최부의 표해록 여행기

넷째 날 - 황산 2

예강 2014. 12. 18. 11:21

천하명산 (황산)


    

 메아리로 남겨두고 온 목소리

  내려가는 길은 올라 올 때보다 먼 거리였다. 눈 내리는 황산의 하늘이 머리 위에 낮게 드리워지고, 겹겹이 둘러친 봉우리들은 지상을 떠나 하늘에 와 있는 것 같다. 얕은 계곡에는 물길이 있어, 얼지도 않고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늘 아래 첫 물길은 새 색시의 거울처럼 맑고 정갈하게 흐르며 목마른 길손을 유혹한다. 모모가 황산의 물을 꼭 마시고 가야 한다며, 정상에서 커피를 마시고 배낭에 넣어 두었던 종이컵을 꺼냈다. 험한 산길을 몇 시간이나 걸어 온 탓에 갈증이 나기도 했지만, 입안을 적신 물맛은 시원하고 달착지근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물은, 가슴을 훑어 내리고 장에 도달 할 때까지 찬 기운이 남아, 머리에까지 신선한 느낌을 전달한다.

  길옆에 회음벽(回音壁)이라고 써 있는 곳이 있기에, 마주 보이는 절벽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소리는 이쪽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눈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자연은 주고 받는 문명세계의 생리를 알지 못하니, 인세(人世)의 야박한 계산일랑 버려야 겠다. 이곳 황산의 눈 속에 내 목소리 하나 쯤 묻어 두고 가도 좋으리.


안개가 아름다운 서해협곡

  봉우리와 나무들과 계곡은 갈수록 기괴하고 신비하다.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험한 바위를 기를 쓰고 올라가 아득한 아래를 기어이 보고야 만다. 내려가는 길이지만 길은 아래로만 향해 있지 않다. 굽이굽이 산이 생긴 대로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몇 십 명이 설 수 있는 넓고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일행과 줄지어 올라갔다. 바위 아래엔 꽤 깊고 넓은 서해협곡이 안개에 가려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득해 보인다. 안개는 우뚝 솟은 봉우리만 내 놓은 채, 협곡 안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감추어 버렸다. 내 생애 이렇게 아름다운 안개를 볼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자물쇠에 담긴 연인들의 소원

  우리가 서 있는 넓은 바위 가장자리엔, 계곡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기위해  쇠말뚝과 사슬로 만든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쇠사슬엔 작은 자물쇠가 빈 틈 없이 매달려 있다. 연인들이 자물쇠에 이름을 새겨 매달아 놓으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아름다운 전설인지 바로 옆에서 자물쇠에 글자를 새겨주는 사람의 장사 속인지 알 수 없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은 연인들의 염원이 자물쇠에 매달려 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왔더라면 자물쇠에 이름을 새겨 놓고 갔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눈길을 밟고 내려간다.    

     

 기이한 모양의 소나무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 전에 산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점 부근에 있는 호텔 앞에 등소평이 황산에 왔다가 지은 시가 시비로 세워져 있었다. 다른 길로 갔던 팀은 이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어, 헤어졌던 이동륜 선생님과 다시 합류 하였다. 음식의 재료는 아까 인부들이 산 아래에서 어깨에 메고 오던 그것이어서 더 귀한 마음으로 조금씩만 먹었다. 점심을 먹고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 전에 더 볼 곳이 있다고 하여, 가이드를 따라 다시 산을 오른다. 그 길에는 자연유산에 등재된 소나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벽에 한그루의 소나무가 뿌리를 박고서 안개 짙은 계곡으로 가지를 뻗치고 있다.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계곡이 바다로 보이고, 손처럼 내어 민 가지가 마치 바다를 탐하는 듯이 보여 탐해송(貪海松)이라 부른다. 하나의 소나무가 두 개로 갈라져 부부 소나무로도 부르는 연리지(連理枝)도 있고, 소나무 가지의 형태가 거문고를 타는 것 같아 수금송(竪琴松)이라 부르는 것도 있었다.

 

단학체조와 실크

  황산아래 주차장에서 산행에 힘들었던 사람들이 지친 몸을 버스에 실었다. 그런데 아직도 기운이 남아있는지 모모와 십 여 명의 사람들은 버스 앞 광장에서 몸을 푸는 체조를 하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 버스를 세우고 휴식을 취할 때마다, 단학을 하는 강선구 선생이 단학체조를 따라하게 하여 여독에 뻐근해진 몸을 풀어 주곤 하였었다. 이래저래 파주향토사팀은 칭찬 들을 일만 하여, 인기가 하늘을 치 솟는다. 버스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어서 가자고 재촉을 한다. 가는 길에 버스는 실크 공장으로 들어가 공장 앞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우리는 착한 여행객, 시키는 대로 줄줄이 공장으로 들어가 누에가 실을 뽑아내는 설명도 듣고, 명주솜 이불이 얼마나 따듯하고 가볍고 좋은지 들으며, 이불솜이 필요한 이동륜 선생님은 솜을 세 개나 샀다. 여러 사람이 선물용으로는 실크 스카프가 적당하고, 부담이 적다며 몇 개씩 사기에 나도 덩달아 서너개 사들고 나왔다.

 

 

명 . 청 거리 구경

  신안 강가에 있는 국제대주점에 여장을 풀었다. 중국에서는 호텔을 대주점이라고 하여, 처음엔 술집 이름인줄 알았다. 두 사람이 쓰는 방이어서 이동륜 선생님과 모모와 나에게 두 개의 방이  배정 되었는데, 이동륜 선생님이 혼자는 무섭다고 하셔서, 여행 내내 내가 혼자 지냈다.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있는데, 모모가 명. 청 거리에 구경 가자고 전화를 했다. 로비에 내려가 있으니 5분 내로 내려오라고 재촉이 심했다. 나만 빼 놓고 갈 까봐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쫓아 나갔다. 젊은 대학생과 중국 여선생과 함께, 신안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어 명. 청 거리로 들어섰는데, 늦은 시간이어서 문을 닫은 상점들이 더러 있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인사동 같은 곳이었다. 오래된 물건들을 구경하고 차에 관심이 많은 모모를 따라 녹차를 조금 샀다.


 휘주문화, 휘주건축 

  거리의 양쪽에 늘어선 집들은 명. 청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집의 좌우 벽이 지붕보다 더 높다. 그런 건축을 하게 된 데는 유래가 있었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안경시가 있었고, 남쪽에는 휘주시가 있는데, 그 둘을 합해서 건륭제가 안휘성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본래 안경시는 정치가 발달하고, 휘주시는 경제가 발달한 곳이었다. 명. 청 시기에는 휘주 문화를 형성할 만큼 휘주상인이 유명 했다. 옛날에 휘주는 오지여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고, 양자강 북쪽 사람들은 그런 마을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송 말기 농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쫓겨 달아나던 사람들이 그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기후와 경치가 사람이 살기에 좋아, 휘주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먹고 살길이 없어 외지에 나가 소금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오곤 하였다. 원래 이곳 사람들이 아니었던 그들은, 각기 부락을 형성하고 때때로 다른 부락을 침입하거나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장사를 하러 나가면서,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조그맣게 만들고, 옆집에 불이 났을 때 방화벽 역할을 할 수 있게 집의 좌우 벽을 높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황산 (참고자료)

  황산은 중국의 화동(華東)지역 안휘성(安徽省) 제일 남쪽 끝에 있으며 안휘성을 흘러 지나가는 양자강 이남에 위치해 있다. 진시황전에는 황산을 삼천자도(三天子都)라 했다고 한다. 진시황 때부터 당천보년(唐天寶年)까지는 의산이라 했는데, 중국인의 선조 헌원 황제가 불로장생약을 찾아다니다가 이 산에 와서 약초를 구해 400년간을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당 현종이 황산이라고 불렀다한다.

  

 황산의 형성은 오랜 변화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약 2~3억 년 전에는 이곳이 망망대해였는데, 약 1억 년 전쯤에 연산운동으로 용암이 침입되면서 오늘의 황산이 화강암을 이루고 다시 몇 천 년의 시간이 흐르며 지각운동과 침식 풍화작용을 거쳐 기암괴석들이 생겨났다. 1990년에는 유네스코에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명나라 때 지리학자이며 여행가인 서하객(徐霞客)은 30년 동안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616년과 1618년에 두 번 황산에 갔다 온 후로 “중국에서 5악 (泰山, 華山, 嵩山, 衡山, 恒山,)을 보면 다른 산은 볼 필요도 없는데, 황산을 보고나면 5악(五岳)도 필요 없다고 하였다.


  1979년 등소평이 75세의 고령에 도보로 황산을 올랐다. 등소평의 명에 의해서 황산은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완만한 돌계단을 쌓아 올라가기에 편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그 곳이 관광 수입으로 잘 사는 곳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황산에는 절이 없었다. 문화대혁명 때 절을 모두 없애 버리고 스님들을 쫓아 냈다고 하는데, 그 후 등소평은 언론과 종교의 자유를 주면서도 관광을 위해 황산에만은 다시 절을 지을 수 없게 하고, 그 대신 절이 있던 자리에 호텔을 짓게 하였다.     

 

                                                                  첩첩이 병풍처럼 둘러친 황산의 봉우리들

                                                            회음벽을 바라보며 소리 한번 질러볼까.

                                                     너무 아름다운 곳이 많아서 사진 찍기에 바빠

                    안개에 취한 서해협곡                                     줄줄이 매달린 사랑의 자물쇠

            저 멀리 보이는 두손 모은 합장봉                                     여기서도 또 한장 찍고

                                                    거문고처럼 생긴 수금송                                               

         안개의 바다에 손을 담근 탐해송              탐해송 앞에 선 이동륜 선생님과 모모

                                     한 나무가 두개로 변한 연리지(부부송 이라고도 함) 


                                명 . 청 시대의 집 (지붕보다 높이 솟은 양쪽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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