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표해록 여행기

셋째 날 - 고려사

예강 2014. 12. 18. 11:23

고려사     

 

다시 신라방에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옛 고려사 터를 보러 항주로 이동하기 전에, 어제 밤에 어둠속에서 잠시 보고 온 신라방이 아쉬워, 다시 보고 가기로 하였다. 신라방으로 가는 거리에는 가로등이 도로 양쪽에 마주보고 서서 아치를 이루고 있는데, 홍등을 줄줄이 걸어 놓아 그 밑을 지나가는 우리를 마치 환영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비오는 자양고가(신라방)를 다시 둘러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중진고두(중진나루)까지 가 보았다. 신라인들이 가끔 들려 차를 마셨을 중진다루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고, 배에서 내린 신라인들이 들어가던 성문을 지나 버스에 올랐다. 신라방 거리의 길이는 1530m에 달하는 꽤 큰 규모였다.

 

고려사

  날씨는 종일 흐렸다. 임해에서의 일정은 모두 끝나고 항주로 이동하였다. 항주에 도착하던 첫날도 밤길을 3시간이나 달려 임해에 갔었는데, 다시 지루하게 세 시간을 달려 항주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서 많은 곳을 볼 수 없었고, 옛 고려사 터를 찾아갔다. 고려사는 송(宋)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이 그곳에 체류했던 것을 계기로 의천과 고려왕실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다. 고려사 터에는 절의 흔적은 전혀 없고, 터에서 발굴한 돌로 기둥을 세워 만든 비각 안에 소동파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절강성에 관리로 와 있던 소동파가 불교를 탄압하여 고려사를 없애 버렸던 것을, 청의 건륭황제가 다시 복원 했다고 한다. 그 후 문화 혁명 때 또 수난을 당하여 완전히 파괴 되고 말았다. 불교를 탄압하여 고려사를 파괴했던 소동파의 동상이 고려사 터에 세워져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리고 고려사 터 일부에는 연못 과 그 옆에 화가산장(花家山莊)이라는 호텔이 있는데, 일본 시즈오카 정부가 지어서 중국 저장성 정부와 공동 경영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중국 정부는 지금 원래의 고려사 터는 놓아두고 근처에다 고려사를 복원하고 있었다.  

 

  용정차

  여행에는 항상 따르게 마련인 쇼핑이 빠질 수 없다. 유명한 용정 차 마을을 보고 가야 한다고 하며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런 일정은 답사 계획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지 여행사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용정은 중국에서도 유명한 차의 특산지라고 하였다. 과연 지나가는 곳마다 주위가 모두 차밭이었다. 들어가라는 대로 한 방으로 가보니 조선족 여자들이 차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한잔씩 따라주며 한국말도 유창하게 차에 대한 설명을 하며 값도 싸고 많이 준다고 우리를 현혹 시킨다. 좋은 차라고 하니까 중국에 온 기념으로, 혹은 선물하기 위해 너도나도 차를 주문한다. 떠나기 전에 딸들이 살만한 것이 없으니 절대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여 그러마하고 대답했었는데, 결국은 한통 사고야 말았다. 차를 사가지고 나오려니 들어갔던 길의 반대쪽 아래층으로 나가라고 한다. 문을 찾아 층계를 내려서는데 넓다란 상점이 나온다. 갖가지 술과 인삼, 도자기도 있고, 온갖 기념품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곳의 판매원이 모두 조선족인 것을 보고,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기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식으로 먹은 저녁식사

  내일 아침 황산에 올라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다시 세 시간을 더 달렸다. 오늘은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호텔에 가기 전에 시내의 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평화로워 지는 것 같다. 신선한 풋김치와 함께 모두들 밥을 많이 먹어, 김치가 불티나게 없어져 더 달라고 하였다.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왔는데, 음식점 문 앞에서 중국 여자가 털실로 짠 모자와 지팡이를 팔고 있었다. 내일 황산에 올라가려면 아무래도 모자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모자 값이 싸서 너도나도 하나씩 사든다. 나도 모자를 하나 쓰긴 했는데,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모모가 사 준 것이어서, 싸다는 생각만 들고 얼마였는지 기억에 없다.

 

 

                    복원 중인 고려사                                        고려사 터에 세운 소동파상

                   

 

 

* 고려사와 관련된 최부의 일기 : 1488년 윤2월 11일(3월22일경)

 

  날씨가 흐렸다. 양수록과 고벽이 함께 왔는데 고벽이 말했다.

  ''항주성 서쪽 팔반령(八般領)에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이름이 고려사(高麗寺)요. 절 앞에 서 있는 두개의 비석은 옛일을 적고 있소. 여기서 15리 쯤 되는데, 조(趙)나라와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와서 세운 것이오. 이렇게 국경을 넘어서까지 절을 지었던 것으로 보아, 귀국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겠소.

  내가 말했다. ''고려 사람이 건축한 절이라 했소? 그러나 지금 우리 조선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유학을 존중하고 있소. 사람들이 한결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벗에게는 신의로써 대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소. 만약 중이 되려는 자가 있으면 군대로 보내 버린다오.  (하략)

 

  고려 때 융성했던 불교가 조선에 와서 유교를 숭상하게 되면서 얼마나 배척 당했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고려사 참고자료

  고려사의 원래 이름은 927년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가 선원으로 건립한 혜인원(慧因院)이었다. 고려 문종(文宗)의 4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31세 때 인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들어가 13개월여 체류하는 동안 이곳에서 고승 정원(淨源)법사를 만나 화엄학을 토론했다. 의천이 귀국 후 재정적인 후원을 한 것을 계기로 이름이 혜인고려화엄교사(慧因高麗華儼敎寺)로 바뀌었으며, 줄여서 고려사로 더 많이 불려 지게 됐다.


  또 의천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의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와 형인 선종(宣宗)도 금물로 쓴 화엄경을 보내 주었으며 숙종(肅宗)은 이를 보관할 경각(經閣)을 지을 경비도 시주했다. 1628년 간행된 ‘옥잠산(玉岑山) 혜인고려화엄교사지(志)’에 따르면 1312년 충선왕(忠宣王)도 고려 관리를 파견해 대장경 한 질과 사찰 보수비용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 이 곳과 고려의 관계는 고려 후기까지 계속됐으며 고려사라는 이름도 1757년 법운사(法雲寺)로 바뀔 때 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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