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외양(牛頭外洋)
도저성에서 최부의 흔적을 다 돌아보고, 점심식사 할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침만 해도 안개가 끼고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차안에서는 웃옷을 벗어야 할 만큼 햇볕이 따듯했다.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왕금룡 선생의 안내에 따라, 최부 일행이 도저진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 밤을 묶었던 안성사 터를 보고 가기로 하였다.
왕금룡 선생은 어제 항주 공항에서 임해의 호텔 부사대주점에 도착했을 때, 호텔에서 만난 분이다. 그는 오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합류했다. 왕금룡 선생은 소설가이며 임해시 향토 사학자인데, 임해시 일대에 있는 최부 표해록의 연구를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서 안내를 하던 왕금룡 선생은, 목소리가 우렁차다고 할 만큼 커서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가 더 시끄러웠다. 가끔씩 그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할 때가 있는데, 창밖의 풍경에 빠져서 딴 세상에 가 있던 나는, 갑자기 벼락 치는듯 한 큰 소리에 기절할 듯 깜짝 놀라곤 하였다.
도저진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던 답사팀은 길옆에다 차를 세웠다. 왕금룡 선생이 가리키는 안성사 터는 낮은 구릉일 뿐, 어디에도 절이 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침에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임해의 특산물이 귤이라고 했는데, 안성사 터 아래에는 귤나무 밭이 있었다. 나는 귤나무 밭가에 내려서서 사진을 찍었지만, 경주의 천마총보다도 높지 않고,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것이 사진으로서의 가치가 없어 지워 버렸다. 안성사는 최부 일행이 바다를 표류하다가 우두외양에서 육지를 밟은 후, 서리당과 선암리를 거쳐 도저소로 오는 도중에 처음으로 잠을 잔 곳이었다.
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 화교진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 7시에 겨우 빵과 죽만 먹고 6시간이 지났으니, 배속에서는 벌써부터 꼬르륵 하는 소리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식사는 아침엔 뷔페식이고 점심이나 저녁은 회전식 테이블을 돌려가며 음식을 덜어 먹는다. 보통 열사람씩 앉게 되어 있는 테이블엔 커다란 그릇에 음식을 담아내는데, 앞에 놓인 개별 그릇은 우리의 간장종지보다 조금 큰 밥공기와 머그잔 뚜껑만한 접시를 준다. 하나씩 차례대로 주는 음식을 보니 삶은 새우와 돼지족발, 무슨 줄기를 볶은 건지 찐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토란대였다. 나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아주 조금씩 음식을 집어서 먹어 보거나, 먼저 먹어 본 사람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먹을 만 하다는 대답들이었지만, 밥 두 종지와 새우만 먹었다. 청경채 무침도 있었지만, 그것을 무친 소스에도 독특한 향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이동륜 선생님의 보물 배낭에서 꺼낸 고추장 , 김, 멸치가 나를 구해 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처음 최부 일행이 육지에 표착한 우두 외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나는 공항에 내려서 처음 버스를 탔을 때부터, 앞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그 자리를 고수 했다. 시야가 확 트인 앞자리는 창밖의 풍경과 거리를 보기에 제일 좋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도로 옆의 건물에서 집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지방은 습기가 많아서 집들이 모두 이, 삼층이다. 한 남자가 슬라브 지붕 위에서, 여자가 양동이에 담긴 시멘트를 도르래로 올려 주는 걸 받아서 쏟아내고, 다시 내려 주고 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부부가 직접 집을 수리하고 있었다.
차는 우두외양을 향해 달린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삼십여 분 거리에 있는 우두외양 가까이에서 버스를 내려 걸었다. 길 한 쪽에 둑길이 있고 길 양쪽의 넓은 새우 양식장이 있었다. 오늘 점심에 먹은 새우도 이곳에서 양식한 것이라고 한다. 최부의 표해록 연구에 빠진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들과 함께 우두외양으로 가는 우두산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인근의 소학교 교사들로 왕금룡 선생과 십 여 년 동안을, 최부 일행의 최초 표착지점을 확인하고 고증하는 일을 해온 향토 사학자이기도하다. 우두산으로 오르며 보니 오른쪽으로 보이는 얕은 바닷물이 심히 검붉고 탁해 보였다. 최부의 일기에 적힌 대로 이곳의 바다 빛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산이라 이름 붙인 우두산 뒤쪽을 외양이라고 부른다. 우두외양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멀리 바다의 동 쪽에 두 개의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최부 일행은 닭처럼 생긴 소계도(小鷄島)와 대계도(大鷄島) 사이에서 조수에 밀려 해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500여 년 전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감회가 자못 깊다. 이런 맛에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최부의 일기 내용을 생각하며 43명의 조선인들이 심한 풍랑의 바다에서 살길을 찾아 뭍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그려 본다. 바다를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에 제비꽃을 발견하였다. 아직 2월인데 이곳이 남쪽이어서 날씨가 따듯하다. 종류는 잘 모르지만, 하얀 색 난초과의 꽃도 피어 있었다.
그곳의 묘지가 특이해서 내려오는 길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올라가기 힘든 언덕에 있어서 조금 아래쪽에서 찍었더니 자세히 촬영되지 않았다. 워낙 큰 나라여서 중국의 묘지는 지역마다 장묘 풍습이 다르다고한다. 봉분은 없고 시신은 땅속에 있는지 평평하게 시멘트를 발랐다. 앞에다 동물상을 만들어 세우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묘 주위를 시멘트로 둘러쳐 흰색으로 칠하고, 머리 부분위에는 복숭아 끝처럼 올라가게 하여 그 가운데에 복(福)자를 써 넣었다. 정월이라 집집마다 붉은색 천에 금박으로 덕담을 써서 문 양 쪽에 붙여 놓고, 그 가운데 복자를 거꾸로 써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오나가나 참 복자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복자를 거꾸로 붙여 놓은 것은 들어 온 복이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최부 일행이 풍랑에 밀려 흘러 온 우두외양 역사의 현장에 서다.
중국의 묘지 둑방길위로 우두외양에서 돌아오는 길
*우두외양에 도착하던 날의 일기를 옮겨 적었습니다.
윤 1월 16일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여 정박하다.>
이날은 흐리고 바다는 검붉은 색이었으며 바닷속은 매우 탁했다. 서쪽을 바라보니 이어지는 봉우리가 중첩되어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감싸고 있는데, 인가에서 나는 연기인 듯 했다. 동풍을 타고 가서 도착하니 바로 산 위에 봉수대(烽燧臺)가 나란히 우뚝 솟은 것이 많이 보여, 다시 중국의 경계에 도착한 것 같아 기뻤다.
오후에 풍랑이 더욱 위태롭고 비가 내려 어둑어둑했다. 배는 바람을 따라 내쳐졌으며, 순식간에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렀다. 해안을 지나며 보니 중선 여섯 척이 나란히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정보 등이 나에게 청하였다. “전에 하산에 도착 했을 때 관인의 의례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권도를 따라 관복을 갖추어 저들의 배에 보이십시오.” “너는 어찌 도리를 해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정보 등이 다시 말했다. “죽음에 직면한 때를 당하여 어찌 예의를 지킬 겨를이 있겠습니까? 잠시 권도를 행하여 살 길을 취하신 연후에 예로써 상을 치르시더라도 의(義)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거절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이 길(吉)이라 한다면 효가 아니고,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을 지라도 효(孝)와 신이 아닌 지경에 이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도를 받들겠다.”
안의가 와서 간곡하게 말했다. “제가 잠시 이 관대를 착용하고 관인인 것같이 보이겠습니다.” “아니다. 저 배가 만약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도적과 같다면 오히려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배라면 반드시 우리를 관부로 몰고 가 그 사정을 진술 받게 할 것인데, 너는 장차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옳지 못하면 저들이 반드시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정도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
갑자기 여섯 척의 배가 노를 저어 우리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사람이 8, 9명 정도 있었다.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 또한 하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해적의 무리와 같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 “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어디에서 왔소?” 나는 정보에게 명하여 역시 글로 써서 답하도록 하였다. “나는 조선국 조정의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해도를 순검하다가 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이곳에 오게 되었소. 그래서 이 해역이 어느 나라의 경계인지 알지 못하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이 바다는 우두외양으로 지금은 대당국 태주부 임해현의 경계에 속해 있소.” 정보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키자 그 사람이 물통을 보내왔다.
또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산에 샘이 있으니 그대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소. 만약 후추가 있으면 나에게 두세 냥을 보내시오.” 내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후추가 생산되지 않으므로 애초부터 가져오지 않았소.” 그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우리 배에서 점점 물러나 우리 배를 둘러싸고 닻을 내렸다. 우리 배 또한 바닷가에 정박했다. 안의와 최거이산, 그리고 허상리 등이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가 인가의 기척을 두루 살펴보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다.
나의 이번 행로에서 거쳐 온 바다의 흐름은 똑같은 바다 같았지만, 물의 상질이나 빛깔은 이르는 곳마다 달랐다. 제주의 바다는 빛깔이 매우 푸르며 성질이 사납고 급하여, 작은 바람이라 하더라도 물결 위로 물결이 더해지고 부딪쳐 빙빙 돌아 물살이 무척 빨랐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기까지 그랬다. 4주야를 지나가니 바다의 빛깔이 희고 2주야를 지나가니 더욱더 희었다. 또 3주야를 가니 붉고 탁했으며, 또 1주야를 가니 붉고 검으며 그 속이 완전히 탁했다. 우리 배의 행로는 바람을 맞아 따르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동서남북으로 부평초와 같이 떠돌아 정처가 없었는데, 그 사이에 본 바다색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색으로부터 푸른색으로 돌아온 이후로 바람은 비록 거세었지만 파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백색으로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서 돌이 많은 섬이 있었다.
섬은 모두 바위 절벽으로 골짜기가 넓고 깊으며 바위가 많이 쌓여 있고 위에는 흙이 덮여 있는데, 잡풀과 향초가 무성하고 푸르렀다. 물이 유유히 흘렀는데, 만일 심한 바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놀란 파도와 거친 물결의 우환은 보기 힘들 것이다. 내가 도적을 만나 다시 표류한 바다 또한 제주 바다의 험난함과 같았다면 어찌 다시 해안가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대개 매년 정월은 매서운 추위가 극에 달하는 시기로 거센 바람이 불고 거대한 파도가 내리쳐 배에 타는 것을 꺼린다. 2월이 되면 점차 바람이 순조로워지는데, 제주의 풍속에서 연등절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한다. 또 강남의 조주 사람들도 역시 정월 바다에는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음력 4월이 되어 이미 장마가 지나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바다에서 항해하는 큰 배가 비로소 제주로 돌아오는데, 이를 박간풍이라 한다.
내가 표류한 때는 풍파가 험악한 때로, 해상의 하늘이 흙비로 인하여 날마다 흐렸다. 돛과 돛대, 배를 매는 줄과 노가 꺾이거나 없어졌으며, 기갈로 인하여 열흘 동안이나 크게 고생했는데, 하루 사이에도 물에 빠져 낭패를 볼 조짐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생명을 보전하여 해안에 정박할 수 있었던 것은 비에 젖은 옷을 짜 물을 받음으로써 창자를 적셨을 뿐만 아니라 배가 실로 견고하고 빨라서 바람과 파도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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