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성 성문. 관사. 양가리 고택
제막식을 마친 후, 골목길을 따라 도저성으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나갔다. 성문은 500년 전에 쌓은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성문은 반월형의 옹성 구조의 형태였다. 명. 청 시대의 성곽시설에서 대부분 옹성구조를 보이는 것은, 성문의 전면을 반월형으로 설치하고 양 측면에 문을 내며, 밖에는 해자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문과 성문이 일자로 되지 않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문 밖 바로 옆에 개울과 길이 나란히 놓여 있는 길이, 바로 최부 일행이 성으로 들어갔던 길이다.
우리는 그때처럼 길을 따라 그들이 머물렀던 관사를 찾아 갔다. 도저성에는 최부 일행이 1월 19일에 도착하여 2월 23일까지 머물렀던 관사가 아직도 있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최부는 조선인인지 왜구인지, 어떻게 표류했는지, 직책이나 가족에 대해서까지 조사를 받았다.
도저성 마을에는 양가리 고택이 있어서 잠시 들렸다.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일가를 이루었던 집으로 추녀 아래 나무 조각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1월 22일의 일기 중에 중국의 파총관이 와서 묻고 최부가 대답 한 대목이 있다. “당신이 해상에 표류하며 먹지 못한 날이 며칠이나 됩니까?” “초사흘부터 열하루까지 못 먹었소.” “그런데 어찌 굶어죽지 않았습니까?” “간혹 생쌀을 씹어 먹고 오줌을 마셨소. 오줌마저 다하면 비를 기다려 옷을 적셔 그것을 마시며, 간신히 한 가닥 머리카락 같은 명줄을 이었으니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따름이오.” “당신의 나이는 몇이나 됩니까?” “서른다섯이오.” “집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벌써 육 개월이나 넘었소.”
서른다섯 살의 조선선비 최부는 자신과 일행 42명을 이끌고 바다를 표류하다가 도저성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곳에서 조사를 마치고 신분이 제대로 밝혀지니, 중국의 관리들은 예의를 갖추어 대해 주었다. 도저소를 떠날 때에는 그 전까지 죄인 취급을 당하며 끌려 다니던 것과는 다른 대접을 해 주며, 최부와 몇 사람에게는 가마를 타고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최부 일행은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북경을 향해 갔다.
도저성 성문
최부 일행이 들어간 성문
고택 문살 무늬
* 최 부의 일기 중에서 도저성에서의 일이 자세히 기록되었고, 또한 최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의 일기를 여기에 적습니다.
1월 19일 (도저소에 도착하다.)
큰 비가 왔다. 천호 두 사람이 함께 말을 타고 우리를 내 몰아서 비를 무릅쓰고 나아갔다. 나는 정보(최부의 從者)로 하여금 허청(중국 관리)에게 고하게 했다. “우리는 바다를 표류하면서 물에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고, 기갈로 죽을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나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여 귀국의 국경에 도착하여 관인을 만났고, 어제 아침식사를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창길 속에서 구덩이에 넘어지고 골짜기에 엎어졌으며, 돌에 부딪치고 진창에 빠져, 몸이 얼고 다리에 힘이 없으며, 마음은 초조하고 힘은 다했습니다. 어제저녁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도 역시 먹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내몰려 큰비를 무릅쓰고 움직였으니, 우리는 아마 중도에 넘어져 죽을 것입니다.”
허청이 말했다. “어제는 그대들이 관사(官司)에 도착하지 못하여 굶주렸는데, 오늘 만약 빨리 도착하면 관에서 공급할 것이니, 빨리빨리 가시오.” 내가 움직일 수 없어 길가에 넘어진 채 몸을 추스르지 못하자, 손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최거이산(이들은 모두 최부의 종이었다) 등이 둘러앉아서 통곡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정보가 천호에게 고했다. “옷을 벗어 줄 테니 이 소를 사서 우리 관원(최부)을 태우도록 하십시오.” 허청이 말했다. “내가 어찌 그대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국법에 구애를 받기 때문에 도울 수 없을 뿐이다.”
이정과 효지, 그리고 상리 등이 나를 교대로 업고 고개를 하나 지나 약 20여리 쯤 가서 한 성에 도착했는데,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다. 성으로 가는 7, 8리 사이에 갑옷을 입고 창과 총통(銃桶)과 방패를 든 군졸이 길 좌우에 늘어섰다. 그 성에 도착하니 성은 중문(重門)이었는데, 성문에 철 빗장이 있었다. 성 위에 망루(望樓)가 줄지어 있고, 성안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가게들이 연이어 있었으며, 사람이 많고 물산이 풍부했다. 허청이 우리를 이끌고 어떤 공관에 이르러 유숙하기를 허락했다. 나의 몰골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고, 의관도 진흙 투성이라 보는 사람마다 다 비웃었다.
왕벽이라는 사람이 글로 나에게 말했다. “어제 이미 상사(上司)에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들을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들이 정말 왜인이오?” “우리는 왜인이 아니고 바로 조선국의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이라는 자가 자친 서생이라면서 나에게 말했다.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 말소리는 다르니 어떤 이유요?” “천리에도 풍속이 다르고, 백리에도 습속이 같지 않은 법이오. 족하(足下)는 우리말이 괴이하게 들린다고 하는데, 나 또한 족하의 말이 괴이하게 들리니 습속은 다 그런 것이오. 그러나 똑같은 하늘이 내려 준 성품을 지녀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과 공자(孔子)안회(顔回)와 같소. 그러니 어찌 말소리가 다르다고 하여 꺼리겠소.”
그 사람이 기뻐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들도 상을 당하면 <주문공가례>를 따르오?” “우리나라 사람도 상을 당하면 한결 같이 가례를 받들고 따르오. 나도 당연히 이를 따라야 하는데, 다만 풍파 때문에 거스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관 앞에서 곡을 할 수 없음을 통곡할 따름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시오?” “시사(詩詞)는 경박한 자가 풍월을 조롱하는 밑천으로 하는 것이지, 도를 배우는 독실한 군자가 행할 바는 아니오. 우리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으로 학문을 삼고 있으며, 시사를 배우는 것에 뜻을 두지 않소. 혹시 어떤 사람이 먼저 창(倡) 한다면 화답은 하지요.”
어떤 사람이 나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당신들을 보건대, 호인(互人,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서 못 보고 못 듣는 사람 같으니 진실로 가련하오.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하겠는데, 이를 기억하고 신중하게 행하여 가볍게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마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차례 우리 변경을 약탈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와 비왜파총관(備倭把總官)을 두어 방비했소. 만약 왜적을 잡으면 모두 먼저 죽이고 나중에 보고하오. 당신들이 처음 배를 정박한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로서, 수채관(守寨官)이 당신들을 왜인이라 무고하여 머리를 베고 현상하여 공을 얻고자 하고 있소. 그래서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약탈한다고 보고하고, 바로 군사를 거느리고 당신들을 붙잡아 참수 하고자 했으나,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왔기에, 그 계획을 행할 수 없었던 것이오. 내일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상세하게 말하시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내가 이름을 묻자 그는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대를 소중히 여기고 위태롭다고 여겼기 때문이오.” 하고 머리를 흔들면서 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쭈볏이 서서 바로 정보 등에게 말했다. 정보가 말했다. “길가의 사람이 우리를 가리키며 참수의 형상을 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음모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에 천호 등 관원 7,8명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주변에 둘러서서 정보를 앞에 끌어다 놓고 물었다. “그대들 선단은 14척의 배라 하는데 사실인가?” “아닙니다. 단 한 척뿐입니다.” 그들은 정보에게 나가도록 지시했고, 나를 끌어내어 물었다. “그대들이 타고 온 배는 원래 몇 척인가?” “단 한 척뿐입니다.” 천호 등이 물었다. “우리 변경에서 어제 왜선 14척이 바다에 같이 정박한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채관의 보고를 벌써 상사 대인(上司大人)에게 보고했다. 나머지 배 13척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귀국의 사람들이 탄 배 여섯 척과 함께 어떤 바닷가에 정박했습니다. 만약 그 배에 탄 사람들을 잘 조사하면 우리 배가 몇 척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왜구인 그대들이 이곳에 올라와 약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왜인과는 말소리도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인은 도적질을 하는데 신묘한 자들로 변장을 하기도 하여 마치 조선인처럼 한 자도 있으니, 어떻게 그대들이 왜인이 아닌지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동거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인패(印牌)와 의대(衣帶), 그리고 문서를 증거로 한다면 바로 그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신 등의 물건을 가지고 오게 하여 추궁 하다가 이어 말했다. “ 그대들은 왜인인데, 조선인을 겁탈해 물건을 얻은 것은 아닌가?” “만약 조금이라도 우리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면 당장 우리를 북경으로 보내어 조선 통사(通事 통역관)와 한 번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진상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그대의 성명은 무엇인가.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직관(職官)은 무엇이며 어떤 일을 주관하는가? 우리나라의 변경에 도착한 사정을 조목조목 쓰는데 감히 속이려 하지마라. 우리는 서신(공술서)을 상사에 보고할 것이다.” “성은 최(崔)고 이름은 부(溥)입니다. 조선국 전라도 나주성에 살고 있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조정 관직에 나아간 지 몇 년이 안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1487) 가을 9월에 국왕의 명을 받들어 해도인 제주 등지에 갔다가, 윤 정월 초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부친의 이름은 무엇이고, 관직은 무엇이며 죽은 곳은 어디인가?” “부친의 이름은 택(澤)이고,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부모를 봉양하고자 입사(入仕)하지 않았으며, 효복(孝服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 가셨습니다.” 그들은 공초(供招 심문)를 마친 후 나를 별관에 묶게 하고, 나와 종자들에게 음식을 주었다.
최부에게 친절히 대해준 이절이라는 사람의 친구가 이절에게 부탁해, 소학(小學) 한권을 가지고 와서 책을 선물로 주고 시를 얻고자 하였다. 역시 최부가 거절하여 그가 돌아가자 이절이 “사귀는 것을 도로써 하고, 사람을 접하는데 예로써 하면 공자 또한 이를 받는데, 어찌 물리치심이 그리 심하시오?” 하니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는 것이 아니라, 시를 얻는 것에 뜻이 있는 것이오. 사람을 사귀는데 도로써 하지 않고 사람을 접대하는데 예로써 하지 않았으니 내가 만약 받는다면, 시를 팔아서 값을 취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물리쳤소.” 이에 그가 “과연 그렇겠소.”하고 물러갔다. 그러니 조선 선비들이 시를 경박한자가 풍월을 조롱하기 위한 밑천으로 한다는 말은 시문을 함부로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참고자료 한길사본 표해록의 주석 내용 : 조선의 관인에게는 중국의 관료들이 시를 요구하는 경우, 이를 물리치는 것이 하나의 풍조였던 것 같다. 한 예로 요동의 장인대인(掌印大人)이 진무에게 부채를 주면서 조선 사행에게 시를 요구했으나, 허봉 일행은 조선 사람들은 경서에만 힘쓸 뿐 풍월을 읊을 겨를이 없었다며 거절했던 것이 그것이다.
허봉(1551~1588), <조천기> (연행록선집) 1573년 6월 24일. 그러나 반드시 사행 전부가 시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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