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와 송성
이슬비 속의 서호
서호를 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유람선 선원들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선착장에 배를 대 놓고 내리라고 한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나마 탈 수 있었던 것은, 가이드가 미리 전화를 했기 때문에 기다려 주었다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손님 대접이 어찌 이럴까, 더구나 국익에 관계되는 관광정책이라는 게 있을 텐데. 그들의 처사가 한심 했지만 남의 나라에 와서 어쩌겠는가, 촉촉하게 내리는 이슬비 속을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진주 목걸이
서호를 보고 나와서 버스는 전단강가에 있는 진주 전시장으로 우리를 데려 갔다. 양식 진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꺼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진주 제품 매장으로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었다. 값은 싼 듯 했지만 진주의 질은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 제품보다 상품의 디자인이나 만드는 기술은 조악해 보였다. 선물용으로 핸드폰 걸이를 몇 개 사고 목걸이를 하나 샀는데, 그 목걸이는 집에 오자마자 망가져서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
전당강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진주 매장에서 나와 전단강을 따라 버스는 다시 달려간다. 전단강은 해마다 음력 8월 18일 전후가 되면 바닷물의 대 역류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항주만 하구 근처의 강의 너비가 100Km나 되는데 반해 상류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좁아져서 2Km 정도로 좁아진다. 그런데다가 일력과 월력의 영향으로 만조 때면 대 역류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막으려고 970년 북송 때 제방을 쌓고, 전단강 북쪽에 육화탑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것도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남송의 古城
저녁을 먹은 후 송나라 때의 고성 (古城)으로 갔다. 커다란 성문위에 송성(宋城)이라고 써 있고, 안으로 들어 가보니 각종 민속 관광 상품을 파는 민속촌이었다. 원래 항주는 춘추시대엔 월나라 성지였지만, 항주 사람들은 남송의 악비장군이 있던 시대를 더 그리워 해 송성이라고 부른다. 성안에서는 남송 시대의 복장을 하고 관광객에게 말이나 가마를 태워 주기도 하고 기념품을 팔고 무대에서는 서커스를 하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송성 가무 쇼 '송성천고정'을 보기 위해서 들어 온 터라 우리는 부지런히 넓은 송성 안을 가로질러 극장으로 갔다. 시간이 갈수록 넓은 극장안은 만원을 이루었다.
宋城千古情
시간이 되자 정확하게 쇼가 시작 되고, 쇼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황제의 생일 연회장, 중국 비단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황제와 귀족들이 둘러 서 있는 가운데 무희들의 현란한 춤이 펼쳐졌다. 쇼는 모두 4장의 무대를 선 보였는데, 무대 양쪽의 대형 스크린에서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로 가무쇼의 내용이 자막으로 나오고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악비장군에 대한 가무극은 현란한 서커스와 기예가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서호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중국의 전설적인 사랑을 다룬 얘기는, 줄에 매달려 나비춤을 추는 연인들을 사선으로 보이게 하는 조명기술이 환상적이었다.
항주의 마지막 밤
한 시간 동안 쇼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어두운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일정이 끝났나 했더니 발 마사지를 할 순서가 또 남았다고 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우리는 발 마사지를 하는 곳을 찾아 들어 갔다. 다섯 개의 의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조금 후에 남녀 다섯 명의 마사지사 들이 들어 왔는데 나이가 퍽 어려 보였다. 이동륜 선생님은 중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것이라고 한다.
작아 보이는 여자 애들이 순서대로 일사분란하게 척척 해 내는 모습이, 대견해 보이면서도 애처로웠다. 발 마사지는 피로가 풀릴만큼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이를 쳐다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기도 하고 미소를 지어 주기도 하면서,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 일하는 사람이 힘이 덜 들것이기 때문에...
작별인사
중국을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 아침을 먹으며 아직은 아쉬운 생각에 식탁에서 사진을 찍었다. 집 떠나 5일을 지냈으니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주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며칠 동안 함께 했던 분들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나주 시청의 공무원과는 각별히 친하게 지냈었는데, 연꽃 필 때 꼭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탐진 최씨 회장님이나 다른 사람들도, 나주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쥐어 주었다.
가이드 '오광용'군은 처음 이틀은 우리 버스를 타고 그 후엔 다른 버스의 여자 가이드와 바꾸어 타고 다녔다. 그는 눈 오는 황산에 올라 갈 때도 트레이닝복만 입고 있었는데, 여자 가이드보다 설명하는게 아직 서툴러서인지, 개별적으로 주는 수고료를 별로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연민의 정이 들었는지 나와 성이 같아 그랬던지, 측은하여 그냥 떠나 올수 없었다. 공항에서 약간의 위안화를 주머니에 넣어 주며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요.' 하고 등을 톡톡 쳐 주고야 조금 마음이 편해 졌다.
비행기는 제시간에 떠서 인천 공항에 11시 20분 쯤 도착하였다. 짐을 찾아 가지고 그동안 붙어 다녔던 CHINARO 팀과 공항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꺼 두었던 핸드폰을 살려 놓았다. 전화기를 켜 놓자마자 반가운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제야 여행의 환각에서 현실로 돌아와 인천 공항을 나섰다.
챠이나로의 신춘호 선생과 두 학생 (중국에서 마지막 아침식사) 김선생과 모모, 이동륜선생과 나
가이드 오광용군
참고자료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항주
항주는 전당강(錢塘江)의 하구에 있으며, 그 끝은 항주만으로 동 중국해와 이어져 있다. 양자강의 하구의 삼각주도 멀지않은곳에 있으며, 태호를 통해서도 양자강과 이어져 있다. 항주는 그 후배지의 길이 깊어서 옛날부터 문명이 번영할수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이 지방은 월이라 불리며 월왕인 구천이 있었던 곳이다.
월의 이웃에 현재의 강소성 소주를 중심으로 하는 오나라가 있어 끊임없이 월과 전쟁을 별였다. 거기서 비롯된 오월동주라는 말이 나왔고, 오왕 부차는 아버지 합려가 월 때문에 죽었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위해 울퉁불퉁한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그래서 복수할것을 대비하면서 죽을 고생을 하는것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한다. 월왕 구천이 쓰디쓴 쓸개를 맛보면서 오에게 복종했을때 오왕 부차를 쓰러뜨리기위해 절세미인 한 사람을 보낸 것이 바로 중국미인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 서시이다. 그녀는 저라산(苧蘿山)에서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는데, 넓은 의미로 절강선 제기현의 회계산 서쪽에 살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항주의 호수는 당의 대력(大曆) 연간(766~779)에 <이필>이라는 사람이 호수의 북방에 석함교를 만들고 수문을 설치해 호수를 관개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서호는 뛰어난 경치를 자랑할뿐 아니라 생산에도 공헌하게 되었다.옛날에는 명성호(明聖湖)라고도 했다.
여기에 장경(長慶)연간(821~ 824)에 백거이가 이곳에 지방장관을 지냈다. 백거이는 알기쉬운 표현을 사용해서 시문을 만든 사람이다. 그의 [백씨문집]은 문화인의 필독서였다. 그가 이필이 해놓은 일을 더욱 발전시켜, 긴 제방을 쌓고 그곳에 모아둔 물을 관개에 사용해 밭 천경이 그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백거이가 쌓은 제방은 지금까지도 남아있어 '白堤'라고 불린다. 백거이가 51세부터 3년 남짓으로 가장 원숙한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춘제호상(春題湖上), 항주춘망(杭州春望), 서호유별(西湖留別)등 많은 시를 지었다. 서호유별은 3년 임기가 끝나고 장안으로 돌아갈때 지은 칠언율시로 몇구절 보면
이곳 저곳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어디서나 사랑스러워 미련이 남는 땅인데
그 중에서도 헤어지기 싫은 것이 서호다.
백거이가 항주를 떠나고 265년뒤, 1089년 북송의 원우(元祐)4년에 소동파가 항주의 지사가 되어 부임했다. 당과 송을 대표하는 대시인 두사람이 모두 항주의 장관이 되었던것은 기이한 인연이라 할수있다. 더구나 두사람 모두 임기가 3년이었으며, 둘다 제방을 쌓았다.
소동파는 서호의 진흙을 쳐내어 둑을 만들었는데, 그성은 백거이가 쌓은 제방보다 길다. 이것을 소제(蘇堤)라고 한다. 백거이는 북쪽에 소동파는 서쪽에 둑을 쌓았다. 소동파는 30대중반에 항주의 통판(부지사)로 부임했었고, 50대 중반에 지사로 근무를 하여 두번이나 부임했었다. 백거이보다 항주에 더욱 정이 든 사람이다.
청의 강희제와 건륭제도 강남을 좋아했다. 1705년 강희제는 서호의 고산에서 묵었다.일본의 다도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월주비색의 찻잔은 오월국 시대에 절강에서 구운것이라고 한다.
북송이 금에게 수도 변경을 함락당하고 휘종(徽宗) 황제 일행이 납치되었던것은 1126년의 일이었다. 북송은 이때 멸망했다. 난을 피한 황자 한사람이 남쪽으로 도망쳐 다음해 송황조를 다시 일으켜세웠는데, 그가 바로 남송의 고종이다. 이 남송이 수도로 선택한곳이 이곳 항주였다. 약 150년동안 수도였는데, 이 시기에는 임안(臨安)이라 불렸다.
이 남송정권 안에서 주전파였던 악비장군이 금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굉장한 전과를 올렸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살당했다. 항주는 원에의해 멸망할때 전화의 피해를 받지않았기 때문에 원이 들어서고 나서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릴수 있었다. 항주의 번영상은 쿠빌라이 시대에 멀고 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중국을 찾아왔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항주는 오래된 도시이기 때문에 오래된 사찰이나 유적이 많다. 오래된 절을 대표하는것이 영은사이다. 영은사 주면에 천축산이 있고, 이곳에도 오래된 절이 많다. 육화탑 앞의 전당강은 항주만의 밀물과 충돌하면 높은 파도로 보이는 해소를 일으키는데, 이것을 '절강도'라고 한다. 음력 8월 15일을 전후해서 최고조에 이른다.
가까운곳에 용정차마을이 있어 절강성하면 차의 대명사인 '국차마을'로 불리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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