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역사민속 자료관>
1978년에 개관한 쓰시마 역사민속 자료관은 대마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민속 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 <성신지교린비>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역사자료관 부터 들어갔다. 역사자료관 안에는 신라시대의 불상과 청동거울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최초로 교린수지라는 조선어 학습서를 지은 ‘아메노모리호슈’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가장 유명한 소장품은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그림이고, 부산에 설치되었던 왜관 그림과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등 소장품도 전시되어 있다. 쓰시마 민속자료관은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 흔적과 옛 대마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 유적지>
쓰시마민속박물관 마당에 있는 고려문은, 에도시대에 대마도를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의 행렬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수 백 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 성문을 통해 이즈하라 성내로 들어갔을 텐데 문은 크지 않았다. 고려문 바로 옆에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열 두 번의 조선 통신사 일본 방문은 모두 대마도를 거쳐서 일본 본토로 들어 가야하기 때문에 대마도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한국 관련 유적들은 조선통신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300~500명에 달하는 조선의 문화사절과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대마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국제 교류였던 셈이다. 1992년에 세운 이곳 조선통신사비는 한국 관광객을 의식하여 세운 비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즈하라는 조선통신사를 빼 놓으면 할 이야기가 없는 곳이다.
<만제키바시(萬關橋)>
인공적인 운하 위에 설치한 만관교는 수심 4.5~5.1m, 폭 40~65m, 길이 210m로 1904년 완공하였다. 세 번의 보수공사로 지금의 다리는 처음보다 약 10M 정도 이동된 자리에 있다. 애초에는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 섬을 한 바퀴 돌아가는 불편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러일전쟁 때 승리의 원동력이 되어 "쓰시마 해전"의 대승을 가져다준 다리이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했다. 그 후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에는 러·일 양국이 서로 선전 포고를 하였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러시아는 육지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 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대마도의 아소만에 미리 함정을 대기시켜 발틱함대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시간이 촉박한 발틱함대가 최단거리인 쓰시마를 통과하게 되자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때 도고가 사용한 전법이 이순신장군의 학익진이다. 해군제독인 도고가 가장 존경했던 군인이 이순신 장군이었기에 이순신장군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했던 것이 승전을 하게 된 결과라고 한다. 만제키바시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고, 조선을 패망하게 한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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