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쓰시마)

15. 조선 역관 108명의 죽음

예강 2014. 12. 10. 02:11

15. 조선 역관 108명의 죽음

 

 

<한국 전망대>

  역관사의 수난지비가 서 있는 대마도의 카미쯔시마 최북단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는 거제도까지 49.5km, 부산까지는 약 50km정도 떨어져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까지 아주 잘 보인다고 한다. 부산에서 불꽃 축제가 열리는 날은 대마도 사람들이 망원경을 들고 올라와 구경을 할 정도이다. 한국전망대는 일제 강점기 쓰시마에 잡혀온 한국인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이나 추석명절에 올라와 한국 땅을 바라보며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도 했던 곳이다. 그래서 1997년 부산이 보이는 이곳에 전망대를 세우게 되었고, 탑골공원의 팔각정을 본떠 건축초기 단계부터 한국산 재료를 구입하여 사용하는 등, 한국적인 것을 고려해 지었다.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

팔각정 옆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가 세워져 있다. 역관사는 오늘날 외무고시에 합격한 직업외무공무원에 해당된다. 숙종 29년인 1703년 2월 5일 아침 부산항을 출항한 배 3척이 있었다. 정사 한천석(韓天錫), 부사 박세양(朴世亮)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사 일행이 탄 사선(使船)과 쓰시마번의 책임자 야마가와 사쿠자에몬이 방문을 위해 보내준 예인선이었다. 출항 할 때는 날씨가 좋았으나, 정오가 지나자 기상이 악화되어 3척 모두 좌초되고 말았다. 쓰시마번과 마을 사람들이 구조에 나섰고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도착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와니우라 앞바다에서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역관사 일행은 조선통신사와는 별도로 쓰시마까지 100명 정도의 규모로 구성되어 파견된 통신사 사절로 에도(江戶)시대에 50회 이상 일본에 파견되었다. 대마도의 경조사 때, 또는 한일 외교 상 의견 절충이 필요할 때 방문하여 당시 한일 선린외교의 실질적인 중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고 당일은 3대 쓰시마 번주 요시마사의 장례와 5대 번주 요시미치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하던 중이었다. 1991년 3월 20일 한일건립위원회가 이국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역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한국전망대 옆에 추모비를 세웠다.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91년에 112개의 영석으로 비를 세웠으며 정역관사 한천석 외 111명의 이름을 돌 판에 새겼다.

 

 

<미우다 해수욕장>

  미우다 해수욕장은 1996년 일본의 바닷가 100선으로 인정받은 해수욕장으로 대마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입자가 고운 모래 해변이다. 해수욕을 할 수 있는 여름철도 아니고 그냥 해수욕장일 뿐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배를 탈시간이 아직 남아서 이곳을 들른 모양이다. 이런 것이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랄까. 시원하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 몇 장 찍고 해수욕장을 떠났다. 대마도에 오던 날 내린 ‘이즈하라’ 항이 아닌 ‘히타카츠’ 항에서 오션플라워 호를 타고 1시간 40분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떠나온 바다 저 편 대마도를 돌아보았다. 이익이 될 만한 것은 없고 해적이 자주 출몰하여 관리하기 힘들다고 관심 밖으로 내 팽겨 쳐 두었던 땅 대마도. 그래서 가깝지만 우리의 땅이 될 수 없었던 대마도가 지금에 와서 심히 아까운 마음이 든다.  (끝)

 

 

<한국 전망대>

 

 

 

 

 

 

 

 

<나바론 요새>

 

 

 

 

 

<미우다 해수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