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땅 개성

개성 (선죽교)

예강 2014. 12. 6. 19:55

죽교


  자남산 동쪽 작은 개울에 있는 선죽교는,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철퇴를 맞고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선죽교의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지만 정몽주가 죽은 후에도 핏자국이 계속 지워지지 않고, 주위에는 대나무가 돋아나 선죽교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죽교에 난간이 없었는데, 정몽주의 후손인 정호인이 개성 유수로 와 있을 때 자신의 선조가 죽은 다리를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1780년(정조 4) 주위에 돌 난간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옆에 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니게 하였다.  선죽교의 석재(石材) 중에는 부근의 묘각사(妙覺寺)에서 나온 다라니당(陀羅尼幢) 일부가 끼어 있다고 한다. 다리 동쪽에 서 있는 비(碑)에는 석봉 한호(韓濩)의 글씨로 선죽교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는 조선 제3대 태종이 된 이방원의 <하여가>에 답해 지은 것으로 충성심을 나타낸다. 이방원은 새 왕조를 세우는 일에 가담할 뜻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다리 아래로는 냇물이 탁한 빛으로 흐르는데, 관광객들은 선죽교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설명하는 여자 안내원의 말로는 선죽교의 붉은 색  돌은 후대에 누군가 다른데서 가져다 끼워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남쪽에서 답사여행을 다니다 보면 전설적 얘기나, 야사를 관광객에게 사실처럼 얘기하는 것을 보고 답답했었는데, 북측 안내원의 솔직한 설명을 듣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개성 여행에는 SBS 방송국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는데,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선죽교로 소풍을 다녔다는 분의 어린 시절 얘기를 녹음하고 선죽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린 시절 소풍 다니던 곳에 55년, 반백년도 넘는 세월을 돌아 찾아온 감회가 어떨지 짐작은 하지만, 그의 평생의 그리움을 다는 알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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