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古都 앙코르왓트

왓트마이(Wat Thmei)사원 - 작은 킬링필드

예강 2014. 12. 7. 23:35

왓트마이(Wat Thmei)사원 - 작은 킬링필드

 

 

  상황버섯 홍보관에서 산 버섯 쇼핑백을 하나씩 들고, ‘왓트마이’ 사원으로 출발했다. 작은 ‘킬링필드’라 부르는 왓트마이 사원에는 크메르 루즈군에 희생된 참혹한 백골 탑이 있다. 사원 한 쪽에 있는 백골 탑은 유리 벽 안에 백골이 가득 들어 있는 탑이다.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죽음의 뜰’이라는 의미로,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민주 캄푸차 정권 시기에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라는 무장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을 말한다.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학살을 했다. 특히 지식인들과 승려를 많이 죽였다고 한다. 지금 캄보디아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빨리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 발전 아이디어를 내 놓을 지식인들과 승려들이 모두 처형되고 없기 때문이다.

 

  폴 포트(Pol Porth) 그는 누구인가? 그는 농가에서 태어났고, 2년 동안 승려생활을 한 적도 있다. 프놈펜의 기술학교에서 1년 동안 목수 일을 배웠고, 1940년대에 호치민 휘하에서 반(反)프랑스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1946년부터는 캄보디아 공산당원이 되었다. 1949년 8월 무선전자공학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유학 간 ‘폴포트’는 공부는 하지 않고 혁명 활동에 가담했다. 1953년 1월 프놈펜으로 돌아 와 사립학교 교사로 생활을 하였으나,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게 되자 프놈펜을 떠났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미국이 떠나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크메르 공화국의 ‘론놀’이 해외로 망명한 사이, 프놈펜에 크메르 루즈가 입성하여 폴포트가 정권을 잡자 론놀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은 대 환영하였다. 그러나 폴포트는 국명을 ‘민주 캄푸차’로 개칭하고 새로운 '농민천국'을 구현한다며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화폐와 사유재산과 종교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론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아래 크메르 루즈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7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만 명을 살해하였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19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되었고, 폴포트는 1998년 4월 15일 캄보디아와 타이의 접경지대에서 살해 되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폴포트’는 아직 나이 어리고 철없는 청소년들에게 학살 임무를 주었다. 그들이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평생을 그 죄의식의 업보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또한 ‘폴포트’에게 물어야 할 죄이다. 캄보디아의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에서 살아남았지만 다리를 잃거나 팔을 잃은 장애인이 많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폴포트’는 지금 지옥에 가 있을까. 불교의 윤회사상대로 무엇으로든 다시 태어나 그도 죽음의 위기에 몰려 있을까. 살생이라면 개미 한 마리도 죽이면 안 되는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대체 어떠했기에 그런 괴물로 변했을까. 나는 유리 벽 안에 들어 있는 죽은 이들의 수많은 백골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절대 사람일 수 없다. 사람이라면 그래선 안 되니까. 눈과 코와 입이 있어야할 부분이 뻥 뚫려 있는 백골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왓트마이 사원 입구 

영혼을 위로하는 불상 

백골 위령탑 

왓트마이사원은 절과 함께 있다. 절의 대웅전 

사원 부근의 나무 아래 묻혀 있던 유골들이라고 한다.  

차마 눈뜨고 보기에 처참한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