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역사 유적

홍산문화 우하량유적

예강 2014. 12. 6. 21:30

8월 5일    

 

<몽골 자치구>


  동산취에서 2시간을 달려 능원시에 있는 ‘능원빈관’에서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은 몽골족 자치구인데, 몇 년 전에도 왔었다는 우교수는 볼품없던 빈촌이 몇 년 만에 깨끗한 도시로 변했다고 놀라워하였다. 중국의 토지는 모두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누구의 반대도 없이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 할 수 있다고 한다. 시내의 상가 간판에는 몽골어와 중국어가 같이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중국은 각 소수민족 자치구의 간판에 중국어와 자민족의 언어를 같이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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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인 상점의 간판


<홍산문화(우하량 유적지) “석곽묘”>


  다시 한 시간여를 달려 우하량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가는 길은 기차 길 건널목을 두 번 지나쳐서 비포장도로였다. 지금 찾아 가는 곳은 ‘장군총’으로 석곽을 넣고 돌을 쌓아 만든 석곽묘이다. 전에 한 번 갔었다는 우교수가 그 지점을 찾을 수 없어 잠시 헤매었다. 중국 당국에서 비공개를 하는 곳이어서 표시도 없고, 더구나 길도 없기 때문에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풀숲을 헤치며 들어갔다.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으면, 한 사람이 말을 시켜 한눈팔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재 빨리 사진을 찍으라는 주의를 듣고 갔는데, 과연 한 남자가 저쪽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아 오고 있다. 인솔교수는 빨리 찍고 그만 나가자고 재촉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기원전 3500년의 석곽묘를 보고 감탄하며 환성을 지르며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발굴 흔적만 보고 다녔는데, 나로서는 그 시간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시공을 거슬러, 이곳에서 그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을 쿵쿵 울린다. 20여기의 석곽묘, 이것은 고조선의 묘이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의 묘 형식이다. 이곳 유적에 옥기와 귀걸이 팔찌 등이 부장품으로 들어 있어서 군장급묘와 ‘천단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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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곽묘

 

  그러고 있는데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재촉하지 않아도 모두들 뛰기 시작한다. ?아오던 공안의 입장에서 보면 ‘웬 한 떼의 인간들이 들어와 사진을 팍팍 찍어 대다가, 갑자기 후다닥 뛰어 나가는 꼴을 보고 뭐하는 인간들인가 어안이 벙벙했겠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사진 찍다 들키면 1인당 벌금이 엄청나다는데, 우리는 잡히지 않고 무사히 찍었으니 몇 억 원을 벌었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는 이교수의 말에, 정말 돈을 벌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들 희희낙락 하며 버스에 올랐다.



<우하량 유적지 “여신묘”>


  버스를 타고 지나는 오른 쪽 산등성이를 보며, 두 사람의 교수가 번갈아 가며 우하량 유적을 설명 하였다. 우하량 유적은 조금 전에 본 장군총 석곽묘군을 지나 여신묘로 이어지고, 다시 대형 적석총으로 일직선을 이룬다. 그러나 여신묘는 가 볼 수 없었다. 여신묘와 여신상의 존재는 ‘여왕국’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산문화 지역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옥기들이 부장품으로 발굴 되었다. 그중에 많이 발굴된 옥기들을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옥기들은 곰의 형상을 닮은 옥웅룡玉熊龍이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선사유적지(사적 426호)에서 ‘국내 최초의 신석기시대 옥 귀고리’가 발견 되었고,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일대에서도 5천 년 전 신석기시대 무덤에 부장된 결상이식(耳飾) 옥 귀고리를 발굴하였다. 안도리 옥 부장품은 강원도 오산리유적(기원전 6000~기원전 3000년)과 비슷하거나 더 오래 된 것으로 추정하므로 홍산문화 시기와 엇물리고 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옥은 우리나라의 옥과 같은 형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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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부르는 옥웅룡玉熊龍


  홍산문화는 여러 토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주도 세력은 곰을 숭배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단 터에서는 희생양으로 사용된 곰의 아래 턱 뼈가 발견 되었고, 여신묘 주실에는 기하학적 무늬의 채색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며, 여신상 파편과 함께 흙으로 빚어 채색한 곰의 아래턱이 발견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일부학자들은 많은 연구와 조사를 거쳐, 홍산문화의 곰 숭배 습속은 한민족과 관련이 있으며, 홍산문화 지역은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을 형성하는 단군신화의 무대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하량 유적의 여신묘에 있는 여신은, 단군을 낳은 웅녀의 조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왕국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주목해야할 이유이다. 단군신화에는 웅녀족과 호랑이족이 터를 잡고 있는 곳에 환웅족이 새롭게 유입되어 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환웅족이 어디서 기원하고 이동하였는지의 복잡한 과정은 여기서 생략하고, 호랑이족과 싸워 이긴 요서지역의 웅녀족이 환웅족과 만나면서 단군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참고)


                      

 

<우하량 유적지 “거대적석총”>


  여신묘는 저 산위 어디 쯤 있다는 얘기만 들으며 적석총을 찾아 계속 달려갔다. 적석총이 있는 곳을 말로만 듣고 찾아가는데, 공개하지 않는 곳이어서 어디쯤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적석총을 찾기위해 3번이나 왔다가 못찾고 돌아간 적이 있는 인솔 교수도 자신없어 하며, 버스에 앉아 짐작으로 더듬어 가는데 갑자기 이번 답사팀의 총책임자인 분이 “저기, 저기~ 세워요~ 세워”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무와 풀숲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의 눈에 보이다니, 우리의 조상이 혜안이라도 뜨게 한 것인가. 모두들 그의 능력에 감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지나쳐서 버스가 급정거를 하자 모두들 뛰어내려 험하고 길도 없는 산으로 들어섰다. 험하여 움푹 파인 곳도 있고 풀이 우거져 어디를 딛어야 할지 몰라 잘못하면 발을 삐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모모의 뒤를 따르며 그가 발을 놓았던 곳만 딛고 부지런히 따라 갔다. 평지로 이루어져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을 100여m 쯤 들어가자 넓은 적석총군이 눈앞에 펼쳐졌다. 발굴하여 본래 생겼던 형태대로 쌓아 놓은 여러 개의 돌무더기는 넓이가 상당히 크며 3단으로 쌓은 것이었다. 이곳의 적석총과, 석촌동의 적석총은 같은 형태라는 교수의 설명이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보고 이미 씨족사회 단계를 넘어,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한 사회라고 확인 하였다. 그곳을 포함하여 홍산문화 전체를 "신비의 왕국"이라고 명명 하였는데, 마땅히 부를 국가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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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 적석총 (이곳엔 이런 적석총이 여러군데 산재해 있었다)


 

<요나라 중경탑, 토성>


  우하량 유적지를 다시 돌아 나와, 저녁에 머무를 적봉으로 가는 길은 산이 없는 내몽골 지역으로, 보이는 건 사방이 광활한 옥수수밭 천지였다. 넓은 4차선 도로 옆에는 키 큰 가로수가 도열하듯 서 있어서,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 비교적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었다. 1시간 쯤 가다가 고조선하고 싸웠던 연나라 토성과 요나라 때 세운 중경탑을 보러갔다. 길게 둘러쳐진 토성을 지나 중경탑이 있는 문 앞까지 왔는데, 시간이 늦어 안 된다고 하여 약간의 돈을 주고 들어갔다. 높은 탑신을 올라가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불탑인 중경탑엔 탑 둘레에 채색 불화가 그려져 있었다. 탑이 높아 목을 뒤로 제치고 하늘을 쳐다보듯, 탑돌이 하며 한 바퀴 돌아서 나왔다.



<아~ 린스여>


  적봉시의 ‘금화원대반점’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한 시간이 10시 15분이었다. 11시 쯤 호텔에 들어 짐을 풀어 놓고, 야시장 구경 가자고 하여 다시 나왔다. 20분 쯤 걸어가서 야시장이 있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파장이었다. 몇 몇 장사들이 짐을 싸고 있는 걸 보니,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젊은 축 몇이 술 한 잔 하자고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빨리 씻고 자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역시 그 호텔에도 린스가 없었다. 머리를 감고 빗는데, 어찌나 뻣뻣하게 빗이 안 내려 가는지 “아야” 소리와 동시에 윷가락 굵기의 빗 손잡이가 뚝~ 부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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