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역사 유적

흥륭와 유적

예강 2014. 12. 6. 21:27

8월 6일    


<감기 때문에>


  저녁에 이 호텔로 다시 돌아 와야 하기 때문에, 짐은 놓아두고 7시30분에 적봉에서 오한기敖漢旗를 향하여 출발 하였다. 8차선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가다가 10시가 넘은 시간에 오한기의 어느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다시 출발한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지나며 30~40km의 속도로 운행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떠나기 전부터 약간의 감기 기운으로 기침을 했는데, 아직 비닐도 뜯어 내지 않은 새 버스의 에어컨 성능이 좋아서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내 자리의 에어컨을 꺼 보아도 실내의 공기가 워낙 차서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자꾸 기침을 하는 것이 짜증이 나지 않을까 내 앞뒤에 앉은 분들에게 미안해서 기침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절대로 숨 길수 없는 것은, 사랑에 빠진 이들의 행복한 표정과, 재채기와 기침이라니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갈라진 지형>


  비포장도로는 곳곳이 빗물에 파여 있어서, 덜컹 거리는 버스는 우리의 몸을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어 댔다. 움푹 파인 곳을 피하느라 계속해서 S자로 운전하는 버스 기사의 솜씨가 여간 아니다. 가는 길 양 쪽은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고, 길 가까운 지점엔 땅이 갈라져 계곡을 이루고 있는 곳이 수 없이 많았다. 우하량 유적지에 갈 때도 그런 모양을 보았었는데, 마치 지진에 의해서 ‘쩍’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갈라진 길이는 수십 m에서 백m가 넘는 곳도 있고, 넓이는 10m도 넘어 보였다. 지리학 박사인 이교수의 설명으로는, 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순환을 반복한다고 하였다. 이곳의 구릉도 노년기를 지나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는 중이며 갈라진 땅은 산과 계곡으로 새롭게 재탄생 한다고 설명 하였다. 처음 들어 보는 땅의 순환 주기와, 처음 보는 지형이 신비롭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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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기로 돌아가는 갈라진 지형


 

  식사 시간을 빼고도 4시간이 넘게 달려 와 용변도 볼 겸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길 양 쪽에 끝없이 구릉이 펼쳐져 있는 곳에 차를 세우게 한 인솔 교수는 길 양쪽을 가리키며, “여성들은 이쪽으로 가시고, 남자들은 저 쪽으로 가서 적당히 가려진 곳에서 볼일 보세요.”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볼일이 없는 나는 차에서 제일 늦게 내려, 갈라진 지형의 사진을 찍으러 갔다. 갈라진 지형 앞에 서있는 남성의 뒷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발길을 돌려오는데, 두 사람의 젊은 남성이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여기를 가도 여자 분들이 앉아있고 저기를 가도 여자들이 있어서 소변 볼 데가 없네.” 양쪽으로 갈라서 가라던 인솔자의 말이 지켜지지 않은 모양이다. 몇 시간을 달려와 멀고도 험한 산길에서 까지, 세련된 도시의 예의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흥륭와興隆窪 유적>


  오후 1시가 지나서 흥륭와 유적에 도착 하였다. 길에서 낮은 구릉으로 올라가, 메밀과 옥수수 밭 사이로 버스를 타고 들어가니, 넓은 평지가 나왔다. 이 곳 흥륭와 유적은 농부가 밭을 갈다 옥기를 주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에도 한반도와 고조선 고유의 빗살무늬 토기가 있었다. 기원전 4500~6000년 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흥륭와 유적은, 주변에 1m 깊이의 해자가 둘러쳐 있었다. 발굴한 다음에 다시 흙으로 덮어 두었지만, 집 자리의 둘레는 표시해 놓은 채로 두었다. 그 중에 중심부에 자리한 직사각형의 집 하나는 꽤 커서 한 면이 200m X 180m 정도로, 군 장급 부족장의 집이었던 같았다. 이곳에서 집 자리 유적이 150여개나 발굴 되어, 밀집된 취락지구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발굴 한 후 중국 정부에서 세 개의 비석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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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포장도로와 집자리 유적                                                세개의 비석

 

<빨간 빤쓰>


  유적지 앞에서 각기 사진을 찍고 비석 앞에서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느라 빠진 사람을 위해서, 중학교 여교사가 교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 나섰다. 29명의 답사팀원 가운데 여성이 7명이었는데, 여교사는 아직 미혼인 세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동안, 퍽 명랑한 성격으로 우스개 소리를 곧잘 하여 사람들을 웃기곤 하였다. 카메라를 든 그녀는 “화난 사람들 같아요. 자, 미소 지으세요.”하고는 치즈나 김~치 대신 “빤~쓰, 빨간 빤쓰~”하고 소리쳤다. 모두들 웃느라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자 다시 하세요.” 우리는 그녀가 다시 빤쓰를 외칠 것이라 기대하며, 미소 지을 준비를 하였는데, 그녀가 외친 건 “섹~스”였고, 모두들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아이스크림>


  다시 비포장도로를 지나 돌아오는 길에 작은 마을이 있다. 몇 개의 상점이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들어가 소학교 건물로 용변을 보러 갔다. 한참 만에 돌아온 사람들이 화장실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투덜댔다. 더 늦게 돌아 온 사람들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아주 외진 시골 마을에 아이스크림이 있는 것에 놀라워하며 먹어 보니, 맛은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원한 맛에 몇 시간 동안 버스에 시달린 피로가 확 풀렸다. 그곳을 출발한 시간이 4시, 오후 5시가 되서야 오한기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한기 박물관>

  

  홍륭와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이 있는 오한기 박물관으로 갔다. 교수는 이곳에 있는 유물 중에 옥저룡과 비파형 동검을 꼭 눈 여겨 보라고 하며, 사진을 못 찍게 하니 재주 것 찍으라고 하였다. 각 유물관 마다 직원이 지키고 있어서 사진을 찍기 쉽지 않았지만, 나는 재빨리 옥저룡과 비파형 동검을 몇 장 찍었다. 카메라 성능이 좋지 않아 실내에서 찍는 사진이 선명하지 못했다. 사진이 잘 안 찍힐 때 마다, 여행하기 얼마 전에 물에 떠내려 보낸 새 카메라가 더욱 아쉬웠다. 한국 돈으로 40000원 쯤 하는 오한기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실어 놓은 책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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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파형 동검                                                             옥저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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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족기                                                                     채색 도기


<하가점夏家店 하층 유적>


  오후 8시 15분,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홍산 문명의 하가점 유적을 보기 위해 찾아 가는 길에 그곳을 잘 안다는 박물관 직원을 유적지 아래서 만나 같이 올라갔다. 길도 없는 곳으로 올라가 수로의 둑을 따라 가는데, 점점 어두워져서 길이 안 보인다. 해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 넓고 깊은 수로는 그냥 수로일 뿐이고, 한 참을 가도 찾으려는 곳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 내일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덜 위험해 보이는 적당한 곳을 찾아서 내려가야 한다. 길이 없으니 발 딛을 곳이 마땅치 않았고, 내려가는 길이 험하니 자연히 붙잡을 것이 필요 했다. 이 나무 저 나무 잡히는 대로 붙잡고 내려오는데, 자두나무가 한 그루 눈에 띄었다. 야생 과실에 개자를 붙여 개 복숭아니 개살구니 하고 부른다.  자두는 개자두라고 하는 걸 못 들어 봤지만, 아무튼 개 자두나무를 휘어잡고 내려오는데, 후드득 열매가 쏟아져 내렸다. 흙바닥에 나뒹구는 열매 중에 성한 것으로 몇 개 집어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짐정리 할 때 굴러 나온 것을, 깨끗이 씻어 먹어 보았더니 과일 향이 독특하고 맛이 퍽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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