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 길을 따라

조선통신사 길 (경가도)|

예강 2014. 12. 6. 20:41

<경가도>

 

  그 마을의 거리를 경가도 혹은 조선인가도라 부르는데 그 일대에는 400~500년이 넘은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 시대엔 이곳이 오미상인의 마을로 오미상인(하치만 상인)들은 일본 전역에서 활약하였다. 현재는 주택으로 쓰이고 있는 곳도 있고, 상가로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야스(野洲)에서 시가현 히코네시(彦根市)로 가는 41km의 길은 조선통신사가 지났던 조선인 가도(朝鮮人街道)로 불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막부(幕府)의 최고 책임자인 쇼군(將軍)만 이용하던 이 길을 조선통신사에게만 통행을 허가한 것은 일본이 통신사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는지를 보여준 예이다. 원래 이름이 교가이도(京街道)였던 이 길은 에도 막부에 큰 의미가 있다. 도쿠가와는 1600년 9월 세키가하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일군의 장수들과 싸워 이겨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교토의 일왕(日王)을 만나러 갈 때 이용했던 길이다. 승리의 길이자 개국의 길이었던 셈이다. 에도 막부는 그동안 이 길을 쇼군 외에는 누구도 못 쓰게 했었다. 

 

 오래된 저택을 구경하며 마을 끝에 있는 하치만보리 수로에서 오늘 바쁘게 돌아다닌 답사 길의 피로를 풀며 한 숨 돌렸다. 이곳 하치만보리 수로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운하로서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비와코 호수를 왕래하는 배들을 이곳에 기항시켜 상업지구로 발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도요토미 히데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이의 아들로 아들이 없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다가 히데요시가 50세가 넘은 나이에 아들‘히데요리’를 낳게 되자 히데쓰구에게 반역죄를 씌워 할복자살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역시 친족에게도 잔인한 인물이었다.

 

 조선인가도의 거리에서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었는데, 한국에서 먹던 맛과는 다른 게 맛이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