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며
차는 기호식품으로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다르다.
여러 가지 차 중에서도 나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편이다. 예전에는 설탕과 크림을 적당히 넣은 다방커피를 마셨지만, 요즘 들어 단 것을 싫어하게 되면서부터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신다.
커피는 주로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생산되는데, 커피나무에서 딴 빨간 열매의 껍질을 벗겨 낸 것이 연녹색의 커피 빈이다. 녹색의 커피 빈을 볶으면 진갈색의 원두가 되는데, 원두의 품질에 따라 커피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고 한다.
대학로에 가면 50년이 넘은 오래된 다방이 있다. 요즘은 커피와 음료 파는 곳에 커피숍 또는 커피전문점 등의 간판을 달아 놓거나 외국 브랜드의 커피하우스가 성행을 하고 있지만, 그곳은 아직도 다방이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있다. 커피의 맛과 향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일부러 찾아 가곤 한다.
커피는 이야기 할 상대가 있을 때 더 좋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분위기 좋은 찻집에 앉아,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 밀어를 나누며 마시는 커피 맛은 어떨까. 사랑의 느낌처럼 달콤하고 고소하고 새콤한 맛이 아닐는지.
한국에 커피가 들어 온 것은,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살 때, 러시아 공사가 커피나무 열매를 가져와 고종에게 시음하게 한 것이 최초라고 전하여 진다.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커피를 마셨던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 온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커피를 찾았다고 하니, 고종은 그동안 그 맛에 중독되기라도 했었던가. 그때부터 커피는 궁중에서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로, 궁중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입안을 향기롭게 적시며, 상류사회의 기호식품이 되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1900년 초, 서울 광교에서 장사하던 서양인이 거래하던 조선 상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존재를 알렸다. 그때 커피를 처음 보게 된 사람들은 검은 색깔이 나는 탕약 같다고 해서 커피를 ‘양탕국’이라고 하였다. 2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식 커피하우스가 들어오면서 ‘끽다점喫茶店’이라고 했다. 그 후 60~70년대에는 음악다방이 성행했고, 음악다방은 지금은 50~60대가 된 그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며 낭만을 심어 주었다.
내가 커피를 처음 맛본 것은 10살 무렵이다.
미군부대 군속인 아버지의 친구가 선물로 가져온 다갈색의 커피는, 뜨거운 물을 부으면 김이 피어오르며 독특한 향이 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달콤하면서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특별한 맛이 사르르 혀끝을 감돌며 자극적이었다. 그때까지 커피는 생소한 음료였으니, 우리 집에도 당연히 커피 잔이 없었다. 아버지는 하얀 사기그릇에 커피를 담아, 막사발에 녹차를 담아 마시듯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마셨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남겨 주시는 몇 모금의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내 몫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아버지는 커피는 독해서 자꾸 마시면 위를 상하게 하니,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하며 커피를 조금 따라 주셨다. 그때 마신 커피의 기억이 남아서, 지금까지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가산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며>라는 수필에서 “낙엽 타는 냄새는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낙엽 타는 냄새가 갓 볶은 커피 냄새와 같지 않은데, 그는 낙엽 타는 냄새와 커피 냄새에 그만의 추억어린 정서가 있었던 가보다. 수필에서 그는 또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서 그대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며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커피의 역사가 천년이 되었다고 하고, 커피를 즐겨 마신 예술가들도 수 없이 많아, 그에 따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온다. 바하가 작곡한 <커피 칸타타>에 등장하는 아리아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는 아버지에게 딸은 “아 맛있는 커피, 천 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라고 노래하였고, 베토벤은 어두워지는 귀와 세상에서 점점 고립되는 외로움을 커피로 달랬다. 커피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들었을 “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겁고, 천사와 같이 순수하고, 키스처럼 달콤하다.”는 예찬은 유명하다. 커피에 인이 박힌다는 말로 중독성까지 얘기되는 걸 보면, 예술가들의 기질에 환각성을 더해 준 것을 아니었는지.
며칠 전 백화점에 갔던 길에 ‘가산’처럼 나도 금방 볶아 갈아 주는 곳에서 커피를 샀다. 가산은 가방에 커피를 넣어 가지고 전차를 탔으나, 나는 쇼핑백에 들어 있는 커피를 가슴에 안고 향을 맡으며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커피를 놓아두고 잠시 나갔다가 들어 와 보니,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커피머신의 거름종이에 진갈색의 커피를 넣고, 머그잔 가득 물을 부었다. 전기 스위치를 켜자 금방 보글보글 끓으며 아래쪽의 유리 주전자에 갈색의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시기도 전에 향에 먼저 취했다.
커피 중에 사향고양이 배설물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 있다. 사향고양이가 잘 익은 커피 열매를 따 먹고 껍질만 소화시킨 뒤 딱딱한 씨앗은 다시 몸 밖으로 내보내는데, 체내에서 효소분해 과정을 거치며 독특한 향이 나는 배설물을 싸게 된다. 이 배설물에서 나온 껍질 없는 콩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 독특한 향과 맛을 낸다는 사향고양이 배설물 커피이다. 얼마나 향과 맛이 좋으면 ‘꿈의 커피’라고 하는지 한 번 맛보고 싶지만, 일반 커피의 열배나 되는 가격이라니 마셔 보는 일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는 그냥 적당한 가격의 갓 볶은 커피만으로도 만족한다. 깊고 풍부한 풍미를 지닌 커피를 마시면 행복하고, 그런 커피의 매혹적인 향기에 취하면 구름 위 선계에라도 든 듯 몽롱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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