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강의를 듣고

예강 2007. 9. 8. 22:50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강의를 듣고>  

                    

   분기별로 갖는 수필 강좌에서, 오늘은 영미 현대수필의 동향과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오늘까지 10번의 강의에서, 대학 교수들의 강의는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들을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여러번 강의를 듣는 동안 거의 빠뜨리지 않고 듣게 되는 것이 있었다. 수필을 말 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찰스 램, 그리고 에머슨과 몽테뉴와 한국의 피천득을 말하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첫 번째 시간의 결론은 개인적인 수필쓰기에서 벗어나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을 쓰더라도 문학적인 내용을 담아야 하고, 미래에 대한 인간의 꿈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인 도덕성을, 격조 높은 필치로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도 참 많이도 들어온 얘기이다.

 

  그렇게 완전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문장을 많이 읽어야하고,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성의 정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잘 알면서도 쓰지 못하는 건, 좋은 수필 쓰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강의 중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미리 읽어 보고 지금까지 들어온 강의와는 좀 색다른 내용에 관심을 가졌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가로써만이 아니라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학사에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히고,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범한 성격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만성적인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마감한 평범하지 않은 그의 생애는, 지금까지도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 영국에서도 웬만한 가문에서 여자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의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페미니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소설가가 쓴 비 소설의 형식이다. 이 책을 쓴 것은 1929 년이니 불과 80여 년 전의 일인데, 여성은 남성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사회적인 제약을 받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여성은 학교의 잔디밭을 밟고 지나가도 안 되고,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없었던 것은 사회의 제재가 여성에게 얼마나 강제력을 띠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우리가 일 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 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되고 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노동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독립된 삶을 살기 원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기혼 여성이 직장인으로 살아가려면, 이중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출퇴근 시간을 지키려면, 살림을 대신 해 줄 사람이 있거나, 부부가 공동으로 가사 분담을 해야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 유교사상이 남아 있고 여성의 일차적인 일자리는 가정이라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있는 한, 여성은 이중 노동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21세기 국가경쟁력은 여성인력의 활용에 달려 있다고 하고, 여성자신의 사회참여 욕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면서, 여성이 주로 해 왔던 자녀 양육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한 여전히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한 뒤에 여성이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요즘 들어 부쩍 매스컴에서 떠들어 댄다. 우리나라도 이미 노령화 사회에서 고령화 사회로 넘어 선지 오래 됐고, 저 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갖가지 출산 정책을 내 놓고 있지만 여성들은 아이를 낳을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출산 정책에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산전후 휴가 사용자를 법적으로 남녀 모두를 정해 놓았어도, 사용자의 98%가 여성인 것은 여성 임금이 남성들에 비해 낮기 때문에, 더 적게 받는 사람이 휴가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니, 여성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주제에 의하면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일들은 모두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질적으로 풍부한 영혼으로 살라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썼던 80여 년 전 보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말 대신 양성이라는 표현을 하거나, 생물학적 성으로 구분 짓는 섹스(sex) 대신 새로운 범주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회적. 문화적 성으로 표현되는 젠더(gender)를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남성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말할 만큼 여성들의 지위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자기만의 방’이 갖는 상징적 의미의 방을 원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양성평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고 상당히 좋아한다는 P 교수는 오늘의 강의 결론에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원래 그 정의가 헐렁한 에세이라는 장르가 최근에는 장르 허물기의 경향마저 두드러져서 이와 같이 특이한 형태의 에세이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고 하였다. 작품과 작가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정의가 헐렁한 에세이라 하고, 장르 허물기에 대한 얘기로 결론을 맺았다.

 

  정의가 헐렁한 에세이라는 말 뜻에 대해 묻고 싶었는데, 강의를 들은 후에 쓸데없는 질문(중요하지도 않고 꼭 물어 봐야 될 일도 아닌)으로 시간을 뺐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던 내가, 남들이 싫어할지도 모를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장르 허물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듯싶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까지 써온 수필 형식에 식상해 하고 있던 터인데 무슨 신선한 방법이 없을까. 어느 한 날, 동인들과 진지하게 토론이라도 해야 할까보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미카와 준페이 作 <人間의 條件>(1)  (0) 2008.05.14
여신묘(女神墓)  (0) 2007.12.27
오래된 집  (0) 2007.09.06
그 여자의 거리  (0) 2007.09.06
어느 소년  (0) 2007.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