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좀 차가운 여자

예강 2015. 9. 10. 00:20

좀 차가운 여

오 순 희

 

  나를 아는 이들은 나에게 성품이 좀 차가운 편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보다 말수가 적어서 차가워 보이고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을 안 보여서 차가워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젊었을 때는, 길을 가다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고개만 까딱이고 지나치거나, 몇 번 만나 아는 정도인 사람이 도로 건너편으로 지나가는 게 보이면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모른 척 지나갔다. 그래서 그때는 거만하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얼굴에 주름이 지도록 활짝 웃으며 ‘안녕 하세요.’ ‘어디 가세요.’ ‘반가워요.’ 하며 다소 호들갑스럽게 인사하는 정 많은 사람들 보다 좀 차갑긴 하다.

 

  차가워 보이는 것은 아버지 D N A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말을 잘 안하는 분이셨다. 다섯이나 되는 내 동생들 중에도 수다쟁이는 없으니 유전인자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어려서 살았던 마을은 작은 농촌인데 전후에 수많은 미군부대가 마을 주위와 산 중턱에 자리를 잡아 기지촌이 돼 버린 곳이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전역 후에 군청 동네에 살던 가족을 이끌고 그 마을로 와 장사를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고모님 댁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아버지를 불러 들였기 때문이다. 말이 없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는 식품 가게 일이 무척 힘드셨을 것이다. 물건 값을 말해야 하고, 깎아 달라는 사람들과 실랑이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친절해야하는 장사가 아버지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작은 가게에는 생선과 건어물, 채소와 과일, 라면과 국수와 음식물 조리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 등, 모든 게 다 있어 요즘의 대형마트 축소판과 같았다. 전쟁을 피해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과 미군부대를 따라서 살길을 찾아 온 사람들로 북적이던 동네에서 가게는 날로 번창해 갔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장사가 잘 되니, 그 마을에 없는 정육점을 내라고 부추겼다. 여섯 명의 자식을 키워야 하는 아버지는 고심 끝에 식품 가게에서 50여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점원을 두고 고깃간을 내셨다. 정육점이 없던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는 두말할 것 없이 장사가 잘 됐지만, 아버지는 매일 점검해야하는 장부를 며칠에 한 번 씩만 들여다보고 점원이 장부를 교묘하게 속여도 의심할 줄 몰랐다. 전쟁 통에 가족을 이끌고 외지에서 들어 와 살던 점원 ‘목삐뚜레이 이씨’가 결국은 고깃간을 다 들어 먹어 망하게 하고 말았다. 그 때도 아버지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말 하였지만, 나는 아버지가 바보 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대 놓고 화를 내지 못한 것이나, 점원에게 아버지 대신 따지지 못한 것은 나 역시 아버지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 때 나는 옆으로 갸웃이 삐뚤어진 목을 흔들고 다니던 ‘목삐뚜레이 이씨’의 목이 아주 비뚜러져 버리라고 저주 했다. 그는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 할 수 없게 했고, 그래서 내가 품었던 문학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는 가게를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맑은 물이 졸졸 흘러가는 산골에 밭을 일구어 메밀과 옥수수와 고구마를 심었다. 비탈진 아버지의 메밀밭 산골짝에는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날고, 송사리 떼와 가재가 물속 돌 틈 사이에서 헤엄치며 놀고 있는 곳이었다. 자연 속에 서 있는 아버지의 가슴에 그제야 솜털구름처럼 포근한 평화가 찾아 들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 보다는 좀 더 말을 잘 한다. 말이 없는 아버지에게 질려 잔소리를 하던 ‘잔소리쟁이’ 엄마의 유전자도 섞여 있었으니.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D N A를 증명 하려다 아버지 얘기를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좀은 조금의 준 말이지만 어감상 조금 보다는 약한 느낌이다. 조금은 크기나 무게 등을 수치로 나타낼 때 좀이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개념인 것 같고, 좀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어렴풋한 느낌이다. 우리 가게 옆 명희네 쌀가게에서는 요즘처럼 무게를 달아서 팔지 않고 말이나 되에 담아서 양을 측정하였다. 명희 아버지는 말을 뉘어서 쌀을 퍼 담고는, 말이 흔들릴세라 가만히 일으켜 세워 덜 담긴 나머지를 담는다. 그리고는 둥근 막대기를 말 위에 올려서 위로 올라와 있는 쌀을 싹 깎아 내렸다. 어느 때 둥근 막대기가 얼른 눈에 띄지 않으면 ‘에라~’ 입속으로 중얼 대면서 손바닥을 말이나 되 위에 올려 가만히 쌀을 깎아 내릴 때도 있다. 그때 손바닥에 힘을 더 주면 그 힘만큼 쌀이 더 깎이고, 힘을 덜 주면 그 만큼 덜 깎인다. 명희 아버지가 손으로 깎은 쌀은 손님의 입장에서는 많이 깎였다고 시비를 걸 것도 못되고, 쌀집 주인의 입장에서는 덜 깎였다고 손해 볼 것도 없는 그냥 좀의 양이었다.

 

  내가 어렸던 그 시절에 아이들은 엄마가 똑같이 나눠 준 군것질 거리를 눈 깜짝할 새에 먹어 치우고는 동생에게 혹은 오빠나 누나에게 손을 내밀어 “나 쫌만 주라.” 하면 눈을 찢어지게 흘기면서도 조금 떼어 준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 시절엔 먹을 걸 가진 친구가 있으면 그걸 먹고 싶은 친구도 “나 좀 주라.”했는데 친구는 잠깐 멈칫하고는 이내 한 쪽 귀퉁이를 떼어 주는 것이다. 그 때의 “나 쫌만 주라.”에는 비굴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도 않았다. ‘나도 조금만 줘’ 보다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은 그 말은 ‘좀’이라는 어감에 있지 않았나 생각 된다. 손안에 쥐어질 것만 같이 작은, 좀이라는 말에는 애교가 들어 있고 친숙함이 묻어 있다. 좀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너그러워지고 싶어져, 저절로 자비스러운 마음이 되어 친구에게 먹을 걸 나누어 주게 되는 게 아닐까. 모든 게 풍요로운 지금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다. 좀만 달라던 친구에게 나누어 주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마음이리라.

 

  성품이 차가운 것은 따듯한 것보다 못하다. 자칫 인정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성품이 차가워 보인다는 말에 변명 하자면, 차가운 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고 내 마음은 따듯하다. 좀 더 해서 내 마음 속에는 사랑도 가득 차 있다. 때로 슬픈 영화를 보면서 ‘꺽꺽’ 목이 메도록 울기도 하는 걸 보면 나는 속이 따듯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좀 차가운 여자’라고 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좀이라는 말을 붙잡고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내게 좀 차가워 보이는 성품을 물려 준 아버지의 영혼은 지금도 그 메밀밭을 서성이고 계시려나. 그 때 아버지의 곡괭이에 끌려올라 온 축축한 흙을 내려다보던 햇빛은, 물기와 미생물과 곰팡이에게 요술을 부리게 하여 보드랍고 축축한 흙속을 생명이 움트는 판타지의 세계로 만들었었지. 아버지가 행복해 하셨던 그곳, 아버지 생각을 하니 코끝이 맵다. 엄지와 검지로 코끝을 누른다. 눈에 살짝 어린 물기는 서너 번 눈을 깜빡여 말려 버린다.

 

  지금 쯤, 아버지가 일구던 산골 밭에도 보일 듯 말듯 아지랑이가 시나브로 피어오르고 있을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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