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관음사

예강 2014. 12. 2. 23:18

관음사

 

 

 

  개성관광이 시작되자 고려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던 나는 개성 관광길에 나섰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이념의 벽이 가로막혀 있는 북쪽 땅에 이렇게 가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넘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수 십 년의 세월을 돌아 이제야 발을 딛을 수 있다니,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 도라산 출입국 사무소에서 까다로운 절차와 주의 사항을 듣고 버스로 개성에 들어서는데 몇 분이나 걸렸을까. 잘 닦인 도로를 잠깐 달렸는데 여기서부터 개성이라고 한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남측에서 설비한 도로는 남쪽과 북쪽을 경계 짖는 금조차 없이 개성공단까지 이어지고, 산야는 늘 보아오던 외갓집 시골풍경을 닮아 있어 낯설지 않았다. 도로에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 모양과 색갈이 다르다는 관광회사 직원의 말을 듣고서야 북쪽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연폭포에서 폭포의 물줄기를 가두고 있는 고모담(故母潭)연못 옆에 있는 조선시대 명기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초서체로 쓴 시를 새긴 용 바위가 있다. 중국 시인 이태백이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 남긴 시구이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

“물줄기가 삼천자를 날듯이 떨어지니 마치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듯하다.”

박연폭포 옆으로 관음사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자 범사정(泛斯亭) 정자가 박연폭포와 마주하고 서 있었다. 안내판에는 “1700년에 지은 건물로 여기에 올라서면 마치 안개바다 위에 떠가는 떼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였다.

 

  범사정을 옆을 지나 산으로 오르면 고려 때 지은 대흥산성의 북문에 이른다. 대흥산성은 사적 52호로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10.1km가 되며 4개의 큰문과 사이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범사정에서 대흥산성에 이르는 길을 옛사람들은 개성의‘금강’이라 하였다. 특히 가을 풍경이 아름답고 신비로워 금강산에 온듯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북문을 통과하여 30여분동안 850m를 걸어 올라가면 관음사가 있다. 관음사는 보물 3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사찰로 광종 21년인 970년에 법인국사가 처음 창건하였다. 현재는 대웅전과 관음굴, 7층 석탑과 승방 하나로 이루어진 작은 사찰로 남아 있다. 고려 말인 1393년엔 대웅전만한 법당이 5개가 넘었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모두 불에 탔다고 하며 현재의 대웅전은 1640년에 고려의 건축을 복원해서 세운 것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뒷문 오른쪽 문살이 미완성인체로 있는데, 거기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절 근처에 손재주가 뛰어난‘운나’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관음사 복원 공사를 하면서 운나에게 아름다운 문양의 문살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던 중 운나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일이 많아 갈 수 없었던 소년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걸 알게 된 소년은 “재간(재주)이 원수다.”라며 자신의 왼팔을 자르고 사라졌다. 사찰 복원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소년을 잊지 못해, 소년이 조각하던 그대로 문살을 걸어 놓고 소년의 모습을 새겨 넣었는데, 문살에 새겨진 소년의 모습엔 왼팔이 없다. 

 

  대웅전 뜰아래에는 7층 석탑이 고즈넉한 절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서 있다. 대웅전 왼 편으로는 1000년 전부터 솟아나오고 있는 샘물이 있고, 그 옆에 있는 관음굴에는 관세음보살 좌상이 홀로 모셔져 있었다. 관광객들은 약수를 떠 마시며, 산을 오르느라 말랐던 목을 축인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좀 차가운 여자  (0) 2015.09.10
탄자니아의 바람  (0) 2014.12.02
고려청자 파편에 매료되다  (0) 2014.12.02
밍크 코트와 노점상  (0) 2009.01.22
얼마나 추웠을까  (0) 200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