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쓰시마)

가까운 외국 대마도 여행

예강 2014. 12. 10. 22:04

1. 대마도는 우리 땅이었다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하고 꼭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열정적인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은 것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열정적인 사랑이야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여행을 떠나는 게 좋겠다.


(2013930일 대마도 여행)

  930일부터 부터 102일까지 23일의 대마도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서 대마도 까지는 49.5km의 거리이며,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한국이 훨씬 가까워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면 1시간 40분이 걸린다. 인구가 45000여명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규슈 사이에 있는 섬으로 행정상으로는 나가사키 현에 속하며, 인공 운하에 의해 남과 북의 두 섬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민들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어촌으로 농지가 전체 면적의 3%에 불과한 척박한 곳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살기에 어려워 그곳의 왜구들이 수시로 우리나라로 쳐 들어와 도둑질을 해 가곤 하였다. 그래서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곳으로 여겼다. 세종 때인 1419년에는 이종무가 1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여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았지만, 속지로 삼을 경우 섬 주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 해 주어야 할 것을 걱정하여 회군하고 말았다. 대마도는 몇 년 전부터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궁핍한 섬이었다고 한다. ‘대마는 일본어 ‘Tsushima[對馬]’를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제주도의 5분의 2에 불과한 709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인 대마도는 오랜 세월 이어져온 한국과의 인연으로 구석구석 한국의 자취를 품고 있는 곳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땅이다)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대마도에서 말을 달렸고 고려시대에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리는 등 실질적인 우리영토임을 입증하는 기록이 남아있고, 특히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실린 팔도총도에는 대마도, 독도,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 그리고 13세기 말 편찬된 일본 진대(塵袋)’에서는 대마도가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고, 사람의 모습이나 토산물이 신라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후생성 발표에 따르면 B형간염을 일으키는 HB-바이러스 표면에는서는 adr, adw, ayw, ayr4종의 단백질이 발견되는데, 일본인은 adr형과 adw형이 7:3정도인 반면 한국인은 거의 100%adr형이다. 현재 대마도 주민역시 100%에 가깝게 adr형으로 나타났다. 대마도의 문화 유적과 대부분의 절에 신라와 고려 때의 불상이 있고 조선시대의 범종이 달려있으며, ‘총각’ ‘지게등 일본에서 쓰지 않는 우리말이 300여개가 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다른 섬에서 발견되지 않는 청동검과 청동거울 등, 고조선 유물이 대마도에서 다량 발견된 것은 한반도와 문화적 맥을 같이 한다는 증거이고, 대마도에서 발굴되는 고분은 일본의 옹관묘와는 전혀 다른 고조선 이래 우리 고유의 장묘양식인 상식석관묘 혹은 상식목관묘라는 점도 그 증거이다.

  대마도와 제주도를 한국영토로 표기해놓은 지도는 얼마든지 있는데,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정식으로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었다. 하지만 전쟁 중인 한국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2.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

 

(조선 통신사 벽화)

  부산에서 930분에 출발하는 오션플라워여객선을 타기 위해, 서울역에서 대마도 여행을 같이 할 일행과 만나 530분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제주도 가기보다 가까운 곳으로 히타카츠항으로 가면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지만, 가던 날은 대마도의 남쪽인 이즈하라항으로 2시간 10분 동안 항해하여 도착하였다. 낚시도구를 든 여행객들이 간간히 눈에 뜨인다. 한국에서도 지방으로 낚시하러 가는 이동 거리만큼 가까운 곳이니, 12일의 일정으로 낚시하러 가는 한국인들이 많고 등산을 하기 위해 찾아 가기도 한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한글학교로 쓰던 건물이 보이는 마을이었다. 길고 긴 하천이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하천에 둑을 쌓고 둑 안쪽에 조선통신사 행렬도 벽화가 순서대로 그려 있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일본인데,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그려 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늘 볼 수 있게 한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부지런히 옮겨 가는데, 나는 벽화 사진을 찍느라 한 참 뒤처졌다.

 

(최익현선생 순국비)

이즈하라항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수센지(修善寺)가 있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작은 암자만한 절이 있는데, 묘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어서 마치 공동묘지에 절이 들어앉은 것 같다. 이곳 수선사는 656년 백제의 비구니 법묘스님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최익현선생의 시신이 부산으로 이송되기 전 나흘간 머무르며 장례를 치룬 곳이다. 1986년 최익현 선생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한일양국의 의식 있는 유지들이 이곳에 비를 세웠다.

  조선말기, 일제 침략에 항거한 민족운동의 지도자, 면암 최익현선생은 1905년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항일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1906년에는 800명의 의병을 데리고 정읍, 순창을 거쳐 남원으로 진입을 도모했으나 당시 남원을 지키고 있던 부대가 왜군이 아닌 우리 측 진위대인 것을 알고는 동포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곁을 지키던 의병 12명과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서, ‘쓰시마(対馬) 감금 3형을 선고받고 대마도로 유배를 떠난다. 그는 이런 처참한 상황에 보신하기 위해 원수의 음식으로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지 않겠다.’며 단식으로 저항하여 다음해인 190711일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시신은 수선사에 잠시 머무르다 14일 이즈하라항을 출발하여 이틀 후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소식을 들은 수많은 시민들과 유림(儒林)들이 몰려 나와 영구를 붙들고 통곡했다고 한다. 현재 최익현선생은 충남 논산 노성에 안치되어 있으며, 정부로부터 항일구국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수선사를 들어서자 바로 오른 쪽에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이라 쓴 최익현선생 순국비 앞에 한 다발의 꽃이 놓여 있었다. 꽃을 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깊이 머리 숙여 명복을 빌었다. 일제 강점기 변절했던 지도층 인사들에 대해 가족을 담보로 한 위협이나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두둔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러나 최익현선생 같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수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있는 한 어떤 이유로도 친일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다.

 

 

  

3. 매국노 이완용 친필 비문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에서 고쿠분지((國分寺)로 이동했다. 고쿠분지는 개인 사찰로 규모가 상당히 크며 이 사찰에도 예외 없이 뒤쪽에 묘지와 납골당이 있었다. 일본에서 절에 묘지를 안치하기 위해서는 1억 원에서 1억 오천만원 쯤 되는 엄청나게 마놓은 돈이 든다고 한다. 산 중턱으로 오르는 곳에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처럼 늘어선 납골당과 묘비들 중에는 너무 오래 되고 돌보지 않아 무너진 비석을 쌓아 놓은 것이 여기저기 있다. 이런 형태는 어느 절이나 똑같은데 굳이 고쿠분지에 간 것은 꼭 봐 두어야 할 것이 있어서이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 산 정상에 우리가 보려고 한 비석이 있었다.

 

  묘역에는 3개의 단 위에 길이 114, 너비 36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총 높이는 2m44이고, 비석 옆에는 석등 2개와 꽃대가 놓여 있다. 이곳의 비석은 한일 합방의 원흉 친일파 이완용의 매국적 행위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증거이다. 이 비석은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의 묘비로, 비석엔 굵고 큰 글씨로 '從三位勳一等國分象太郞之墓(종삼위훈일등국분상태랑지묘)'라 쓰고, 비명 왼쪽 아래엔 '侯爵 李完用 書(후작 이완용 쓰다)'라고 쓴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다. 한일합방 시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의 비서관으로 일본의 통역관 겸 문장가였던 고쿠분쇼타로의 묘에 이완용이 묘갈명을 친필로 쓴 것이다. 을사5적 중 한명인 이완용은 한일합방 후 친일의 대가로 일본 황실이 주는 작위 중에 민간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후작(侯爵)을 받았다. 이즈하라 출신인 고쿠분쇼타로는 조선어 실력이 탁월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작성했다. 특히 한일병탄 때는 조선 왕족과 관리들을 협박하고 일본 측 의사를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한일합방에 깊숙이 관여하였던 이완용은 우리 민족의 원흉 중 한 명인 고쿠분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명까지 써 준 것이다. 이완용과 고쿠분쇼타로는 한일관계 역사책인 '해행총재'를 간행하면서 긴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완용이 고쿠분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명을 써줬다는 사실은 1984년 쓰시마향토연구회가 펴낸 대마풍토기(對馬風土記)에도 기록돼 있다고 한다.

 

  묘비의 뒷면에는 간략하게 고쿠분쇼타로의 일생이 적혀 있다. <고쿠분쇼타로는 조선어를 공부했고 부산 초량 왜관에 연수생으로 가서 조선어를 공부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할 때 통역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고쿠분쇼타로는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를 졸업했고 경성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장관이 됐을 때 탁월한 통역실력을 보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후 조선통감부 참여관,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겸 중추원 서기관장, 조선 왕족을 관리하는 이왕직 차관까지 올랐다. 19219761세로 사망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 위안부문제 등은 한국인의 감정을 때때로 분노하게 만든다. 세계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 가장 먼 나라가 일본이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데 일본에만 가면 곳곳에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다







4. 나카라이 토스이와 히구치 이치요의 운명적 사랑





 

  ‘니카라이 토스이’ 문학관으로 가는 나카무라지구 거리에는 옛날 저택의 돌담들이 보존되어 있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불길이 마을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방화벽용으로 만든 돌담길이 고색창연하게 아름답다. 예전에 이곳은 사무라이들이 살았던 사무라이 거리였다고 한다. 문학관은 니카라이 토스이의 생가를 개조해 만든 것이어서 그리 크지는 않았다. ‘니카라이 토스이 탄생지’라고 쓴 돌이 세워져 있는 대문 안에 들어서니 일어와 한국어와 영어로 쓴 안내판이 걸려 있다. 한국인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기에 이렇게 한국어로 된 안내판과 이정표가 대마도 곳곳에 있을까 생각 되었다. 기념관에는 생가 모형이 자리하고 있고, 니카라이의 일대기와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품 방에는 니카라이의 사진과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히구치 이치요’의 사진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니카라이토스이 문학관(半井桃水館)>

  ‘니카라이 토스이’는 1860년 12월2일 이즈하라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宗(소)가를 섬기는 의사집안으로, 아버지의 근무지인 부산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한국말을 잘 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1875년 16세 때 영문학학원 공립학사에서 공부했고,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현지보도를 서울에서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1884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다. 그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아사히신문에 <오시츤보>를 발표하고 이후 시대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 까지 다방면에 걸쳐 유려한 필체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니카라이는 1882년에 <춘향전>을 번역해 아사히신문에 20회 연재하기도 하였다. 사실 히구치 이치요가 니카라이 토스이 보다 더 유명하였으며, 이치요의 연인이어서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토스이의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는 메이지(明治)시대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일본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졌고, 2004년에 발행된 5000엔 지폐에 새겨진 인물이다. 히구치 이치요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토스이를 찾아 왔을 때는 이치요가 20살이었고 토스이가 32살이었다. 토스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된 이치요는 25살로 요절할 때까지 짧은 생애동안 계속 되었는데, 그 사실은 사후에 발표된 일기에서 밝혀졌다. 타고난 감수성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여성의 감성을 표현한 천재작가인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으로는 섬세한 여성 심리를 묘사한 <매미> <십삼야> <나 때문에> 그리고 유곽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과 의식을 다룬 <흐린강> 등이 있다. 특히 17세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와 <나 때문에> <해질 무렵 무라사키>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전시실을 나와 정원에 놓인 작은 항아리들은 보니 예전부터 있던 것은 아닌 듯 꾸밈의 흔적이 엿 보인다. 대문 옆으로 연결된 돌담은 크고 작은 것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해 보인다. 한국에 돌아가면 번역된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