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덕혜옹주봉축기념비
‘덕혜옹주봉축기념비’가 있는 가네이시 성터 입구에 일본의 목조건축양식으로 지어진 2층으로 된 성문이 있다. 성문 앞 쪽에는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라고 쓴 팻말이 서있었다. 기념비와 가네이시 성터가 있는 곳은 깨끗하게 손질 된 나무와 꽃이 있는 넓은 정원이다.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李王家宗伯爵家結婚奉祝記念碑’ 라 써있는 큰 비석이 큰 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꼭 들렸다 가는 필수 코스여서 그런지 비석 앞에 꽃이 놓여 있었다.
대마도에 ‘덕혜옹주결혼봉축비’까지 있으니 축복 받은 결혼인 것 같지만 기울어 가는 나라의 왕녀로 태어난 것이 그녀에겐 비극이었다. 덕혜옹주는 조선왕조 26대 고종이 환갑 나이에 낳은 마지막 황녀였다. 열세 살에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던 그녀가 열아홉 살이던 1931년 쓰시마의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했던 건 잘 알려진 일이다.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였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으며 유화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 역시도 역사에 희생된 사람이었을까. 소 다케유끼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나쁜 인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비록 정략결혼이었으나 결혼 초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덕혜옹주에게 자상한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고난을 겪은 덕혜옹주는 결혼하기 1년 전에 이미 조발성 치매 진단까지 받은 상태였다. 1932년 딸 마사에(정혜)를 낳고는 오랫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조센징 공주' 라며 심한 따돌림을 당했던 어머니 덕혜옹주처럼 일본에서 차별 대우와 왕따를 당하면서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딸 정혜도 우울증세를 보이며 정신질환을 앓았다. 일찍 결혼한 정혜는 결혼 2년 후 유서를 써 놓고 실종 되었다가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 덕혜옹주는 딸의 일로 더 큰 우울증과 몽유병 등, 정신병으로 시달리다가 1953년 소 다케유키와 강제이혼 당하였다.
강제 결혼과 강제 이혼~ 덕혜옹주의 인생엔 자의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조차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 후 일본에서 불행하게 살던 덕혜옹주를 어느 신문사 기자가 196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귀국해서도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였다. 덕혜옹주가 환국하고 10여년이 지난 후,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가 보고 싶다며 만나달라는 편지를 썼지만, 이방자 여사는 병세가 더 심해질까 염려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후에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직접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문 앞에서 되돌아갔다. 그 후로 그의 소식은 알 수 없고,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었다. 덕혜옹주는 1989년 77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에 있다.
‘덕혜옹주봉축기념비’는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끼가 이혼한 후에 없앴다가 부산 대마도간 선박 취항이 시작되고 한국관광객이 늘어나게 되자 2001년 11월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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