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3일)
<인천항 가는 길>
이번 여행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인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모모와 나는 아침 7시 30분 쯤, 주공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서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주차 하고 온 사이에 버스 한 대는 이미 떠나 버렸고, 15분을 기다려 도착한 차는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승객을 태우고 떠나 버렸다. 방향을 잘못 짚어 반대편에 서 있었으니~.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선 버스 정류장에서 작은 가방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커다란 여행 가방의 바퀴를 굴리며 넓은 도로를 가로 질러 반대편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부평역에서 내려서 인천항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또 타야 한다. 집합시간 10시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지하철을 탈 수 없었다. 시간 잘 지키는 사람 중에 두 번째 가라면 화를 낼 나 아닌가. 그러니 택시를 타야했는데,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기사는 줄곧 우리를 웃겼다. 그의 말은 개그맨을 했어도 성공 했을 성 싶게, 우리와 주고받는 말 자체가 개그였다. 배꼽 빠지게 웃다보니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그의 개그공연비까지 합치면 택시비 13000원은 결코 비싼 게 아니었다. 그의 얘기가 하도 재미있어서 나도 써 먹어야지 했었는데 지금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다.
<배 안에서>
스물아홉 명의 일행과 연안부두의 <인천제1여객터미널>에서 '진인훼리호'에 올랐다. 다른 승객 중에는 단체여행을 떠나는 초등학생들도 있었고, 어느 악단인지 악기를 하나씩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 배안은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 더운 편이었다. 모모와 나는 4인 1실의 객실을 배정 받아 짐을 옮겨 놓았다. 이층 침대의 한 쪽, 아래 침대를 내가 차지하니 모모는 자연히 위로 올라가고 한 방에 같이 있게 된 두 사람 중, 초등학교 교감선생이 아래 침대를 쓰고, 어머니가 인간문화재이며 자신도 국악인인 여인이 위쪽으로 올라갔다. 나는 나답고 모모는 모모 다운 것처럼, 교감선생은 교육자답게 행동했고, 창을 하는 여인은 창을 하는 여인답게 생겼으며 행동했다.
방에 있기에는 너무 답답해 점심을 먹고 갑판으로 갔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올라와 있었다. 날씨가 좋은 탓에 파도가 전혀 없어서인지 배가 움직이는 것 같지 않게 미끄러져간다. 사람들은 해풍에 머리칼을 날리며 갑판 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번 여행의 의미와 역사적 사실의 실증에 대해서 담소하고 토론하며 배안에서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청주 직지 팝스 오케스트라 단원>
저녁 식사 후, 다시 갑판에 올라갔다가 연로한 분들은 객실로 자러 들어가고, 젊은 층 10여 명은 5층에 있는 라이브카페의 한 쪽에 있는 노래방으로 갔다. 나도 같이 갔는데 내가 젊은 층이냐고? 그렇지는 않지만 나도 그냥 젊은 층에 끼었다. 이번 여행의 연령대 분포를 보면 가장 젊은 사람이 30대 후반이고, 가장 많은 사람이 80대 후반이니 나는 그래도 중간축에 드는 편이다.
노래방에서 어울리다가 혼자 나왔는데, 홀에서 연주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방으로 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아무 의자에나 앉아 음악을 들으며 손뼉을 치며 같이 어울렸다. 홀에는 낮에 악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에 트럼펫과 섹소폰을 연주하는 두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 가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감미로움이라니~ 그 밤이 영원히 멈추어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들은 여러 곡을 연주하였다. 옆 테이블에 일행들이 앉아 있어 물어보았더니, 청주의 <직지 팝스 오케스트라>로 ‘진황도’로 해마다 연주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바로 코앞에서 좋은 음악을 듣고는 다소 흥분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채, 그렇게 여행 첫날의 밤은 배안에서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