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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 친필 비문

예강 2014. 12. 10. 22:09

매국노 이완용 친필 비문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에서 고쿠분지((國分寺)로 이동했다. 고쿠분지는 개인 사찰로 규모가 상당히 크며 이 사찰에도 예외 없이 뒤쪽에 묘지와 납골당이 있었다. 일본에서 절에 묘지를 안치하기 위해서는 1억 원에서 1억 오천만원 쯤 되는 엄청나게 마놓은 돈이 든다고 한다. 산 중턱으로 오르는 곳에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처럼 늘어선 납골당과 묘비들 중에는 너무 오래 되고 돌보지 않아 무너진 비석을 쌓아 놓은 것이 여기저기 있다. 이런 형태는 어느 절이나 똑같은데 굳이 국분사에 간 것은 꼭 봐 두어야 할 것이 있어서이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 산 정상에 우리가 보려고 한 비석이 있었다.

 

  묘역에는 3개의 단 위에 길이 114㎝, 너비 36㎝의 비석이 있는데, 비석의 총 높이는 2m44㎝이고, 비석 옆에는 석등 2개와 꽃대가 놓여 있다. 이곳의 비석은 한일 합방의 원흉 친일파 이완용의 매국적 행위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증거이다. 이 비석은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의 묘비로, 비석엔 굵고 큰 글씨로 '從三位勳一等國分象太郞之墓(종삼위훈일등국분상태랑지묘)'라 쓰고, 비명 왼쪽 아래엔 '侯爵 李完用 書(후작 이완용 쓰다)'라고 뚜렷하게 써 있다. 한일합방 시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의 비서관으로 일본의 통역관 겸 문장가였던 고쿠부쇼타로(國分象太郞)의 묘에 이완용이 묘갈명을 친필로 쓴 글씨인 것이다. 을사5적 중 한명인 이완용은 한일합방 후 친일의 대가로 일본 황실이 주는 작위 중에 민간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후작(侯爵)을 받았다. 이즈하라 출신인 고쿠분쇼타로는 조선어 실력이 탁월해 을사늑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작성했다. 특히 한일병탄 때는 조선 왕족과 관리들을 협박하고 일본 측 의사를 전달하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한일합방에 깊숙이 관여하였던 이완용은 우리 민족의 원흉 중 한 명인 고쿠분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명까지 써 준 것이다. 이완용과 고쿠분쇼타로는 한일관계 역사책인 '해행총재'를 간행하면서 긴밀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완용이 고쿠분쇼타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명을 써줬다는 사실은 1984년 쓰시마향토연구회가 펴낸 대마풍토기(對馬風土記)에도 기록돼 있다고 한다.

 

  묘비의 뒷면에는 간략하게 고쿠분쇼타로의 일생이 적혀 있다.

  <고쿠분쇼타로는 조선어를 공부했고 부산 초량 왜관에 연수생으로 가서 조선어를 공부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할 때 통역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고쿠분쇼타로는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학과를 졸업했고 경성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 장관이 됐을 때 탁월한 통역실력을 보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후 조선통감부 참여관,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겸 중추원 서기관장, 조선 왕족을 관리하는 이왕직 차관까지 올랐다. 1921년 9월7일 61세로 사망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 위안부문제 등은 한국인의 감정을 때때로 분노하게 만든다. 세계에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 가장 먼 나라가 일본이다. 여행을 하면서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데 일본에만 가면 곳곳에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