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설날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막내딸과 둘이서 새해 아침을 보내고, 다음날 세 딸과 사위를 앞세워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아침나절은 그렇게 보내고, 오후에는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가 계신 막내 동생 집으로 모였다. 젊어서 디스크를 앓으셨던 어머니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 다니거나 약을 드시며 건강관리를 잘 하여,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어머니께 세배를 올리고 나니, 언제나 그랬듯이 술상이 차려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빈 술병이 늘어 가는 대신, 우리들의 얼굴은 보기도 좋고 기분도 좋게 장밋빛이 되어간다. 안주는 고기보다 손으로 만든 두부지짐이 더 잘 팔려서, 올케와 막내는 기름 두른 팬에 두부 지지기에 바쁘다. 밥을 먹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밥상이 차려지지만, 술과 안주로 채워진 뱃속에 밥이 들어 설 자리는 없었다.
얼마 전 우리 6남매 부부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단양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기에는 설과 추석 명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 위로 딸 넷에 끝으로 아들 둘인 우리 형제들은 나이 차이가 많다. 내가 장녀이고 바로 아래 동생이 세 살 터울인데, 그 아래로 둘째 여동생이 나 보다 열한 살이 어리니, 끝으로 연년생인 남동생들과는 자연히 차이가 많이 날 수밖에 없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래 떨어져 살았던 데다가, 중간에 백 일만에 죽은 남동생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한 집에서 살던 형제들은 분가하여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만나기만 하면 어린 시절 얘기가 단골메뉴이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린 시절 싸우던 얘기며 부모님과 지내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큰 남동생이
“어려서는 누나들을 언니라고 불렀었는데.”
하고 그때를 그리워한다. 나이 많은 누나들에게 바로 위 누나들이 큰언니 작은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딸들만 키워온 어머니가 오랫동안의 버릇대로 큰언니에게 이래라, 작은 언니에게 저렇게 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누나. 내가 언제부터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아?”
“언제부터였는데?”
“내가 중학생 때인데, 육영수 여사가 8월 15일 경축식장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이었어.”
“생전 처음 누나라고 부르려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서부터 마음먹고 갔지.”
그때 나는 결혼을 하고 친정 가까이 살고 있었다. 동생은 나를 보고 용기를 내서
“누나.”
하고 불렀는데 뉴스로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내가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하였다. 모처럼 용기를 내었을 동생은 얼마나 민망했을까. 나보다 15살과 16살이나 어린 두 남동생의 작고 귀여웠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벌써 40대의 중년이 되어있다. 어머니는 소파에 기대 앉아 술상 앞에서 얘기꽃을 피우는 우리를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계시고, 우리의 얘기는 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그때 쯤 술상 한 쪽에 담요가 펼쳐지고, 울긋불긋한 화투짝이 “짝짝.” 소리를 내며 담요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점잖지 못하게 똥도 먹고 싸기도 하면서 돈을 잃어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손을 쉼 없이 움직이며 입도 가만있지를 못하는데, 들어 보면 서로 잘못한다고 비난하는 것 같고 귀퉁바리를 주는 것 같지만, 거기선 말조차도 그냥 유희일 뿐이다. 평소에 쓰지 않던 말을 내 뱉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힘 있게 내리친 화투의 ‘짝’하고 부딪치는 소리에 속이 후련해진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싹 가시고 가슴이 확 트이는 놀이가 화투 말고 또 있을까.
이런 설 풍속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며, 아이들은 컴퓨터에만 앉아 있고 어른은 술과 고스톱으로 명절 연휴를 보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한다. 우리의 전통 놀이에도 가족이 어울려 놀기에 좋은 놀이가 있기는 하다. 연 날리기도 있고, 윷놀이, 널뛰기, 팽이치기가 있다. 또 정월 보름날이면 쥐불놀이를 하며 온 마을이 축제 분위기로 흥겨웠다. 나도 그런 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는데, 그때는 그런 놀이들이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고스톱을 치는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 예전에 바깥마당에 가마니를 깔아 놓고 온 동네 사람들이 윷놀이를 했던 것처럼 방안에서도 윷놀이를 할 수 있지만, 시대가 변해서인지 몇 판 돌아가면 끝나버릴 윷놀이 보다는, 앉은 채로 몇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고스톱이 명절놀이로는 더 제격이 되었다.
그 즈음 화투판에서는 막내 올케가 잃기만 하는 제 남편을 밀어내더니, 시누이 남편들의 돈을 따기 시작했다. 술상 앞에 앉아 계속 잃기만 하는 남편을 바라보던 큰 여동생도 슬그머니 제 남편 뒤로 가 앉는다.
“화장실 안가요? 그동안 내가 하고 있을게 갔다 와요.”
동생은 제 남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마지못한 듯 제부가 일어서고 동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큰 여동생과 막내 제부와 막내 올케의 게임이 시작되어 한두 패 돌아가고 나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동생도 점수를 내기 시작한다. 동생의 입이 귀밑까지 올라가고, 구경하는 술상 앞의 주당들도 화투판을 넘겨다보며 흥미진진해 한다.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막내 제부도 오래 앉아 있어서 허리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제 아내를 부른다.
“난 고스톱 칠 줄 몰라.”
막내 여동생은 고개를 저었지만 제부는 억지로 담요 앞에 끌어다 앉힌다. 잘 할 줄 모른다는 막내 여동생에게 훈수꾼들의 참견이 분분하고, 남편들의 응원까지 이걸 내라, 저걸 먹어라, 고 해라, 스톱해라, 훈수 두는 사람들이 더 재미있어 하며, 왁자지껄 방안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만 간다.
누구나 전통을 지키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흘러가는 세월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도 바뀌고 풍속도도 변하게 되니 전통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주고받는 술잔과 고스톱이 아니면 서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를 하면서 대 여섯 시간을 보내기는 힘들 것이니, 고스톱은 가족들이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데 그리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요즘은 정월 대보름에 쥐불놀이를 하거나, 연날리기와 널뛰기 대회를 하며 지역축제를 여는 곳들이 많아져, 전통놀이에 대해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젊은이들이 전통놀이를 접할 기회가 생겨 다행한 일이다. 고유한 전통의 멋과 맛이 있는 전통놀이에 대해서도 한 번 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어머니 계신 곳에 형제들이 모여, 어린 시절 한 집에 살던 추억을 더듬으며 하루를 지낼 수 있는 건,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더 행복한 일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런 날들을 몇 번이나 더 지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