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해 주소서
- 최부 선생 기념비 제막식 참관기
출발
찬바람이 몰아치는 2006년 2월.
제주 추자도부근에서 표류하여 중국으로 흘러갔던 조선 선비 최부崔溥(1454-1504)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여행단에 동참하였다.
인천공항 활주로에는 하얀 안개가 깔려있다. 그 정도쯤의 안개야 거뜬히 헤치고 비상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후 1시에 출발 예정이던 중국민항기는 언제 떠나게 될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 되었다. 다섯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은 회색 구름이 뒤덮여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하늘로 치솟아 오르니 저 멀리 오른쪽 끝에서 노을처럼 붉은 구름이 간간이 나타나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항주공항에 내려서 대기하고 있던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절강성浙江省 임해臨海로 향했다. 어두운 밤이어서 창밖 정경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간간이 내리다 말다 하는 비 사이로 정월 대보름의 달빛에 도로 옆의 집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에너지 절약을 하느라 불이 켜진 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해서야 저녁을 먹었는데,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기름기를 덜 써서 만들었다는 음식이 독특한 향료 때문에 맞지 않았다.
호텔에서도 에너지 절약을 하여서, 그날 밤 고달픈 여행객은 얇은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야 했다.
도저성
아침 6시 30분 모닝콜 소리에 깨었다. 호텔 뷔페식당에서 죽 한 공기와 속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빵으로 아침을 마쳤다. 식사를 끝내자 도저성桃渚城을 향해 축축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렸다. 버스가 시내를 빠져나가 한적한 산길로 접어드니, 창밖으로 화전민의 밭처럼 아래서부터 위로 층층을 이루고 있는 산들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산의 흙을 파다가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는데, 흙을 층층이 파내는 것은 산사태를 막기 위해 한 층의 흙을 퍼낸 다음 다져 놓고, 또 한 층을 파서 다져놓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을 짓기 위해서 여러 개의 큰 산들이 훼손되고 있는데, 인구가 공식적으로는 13억을 넘었고 기록이 안 된 사람만도 1억이나 되며, 지금도 계속 아기를 낳고 있어서 중국인 숫자는 하느님도 모른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한참을 달려간 버스가 성 입구에 도착하자 내려서 걸었다. 성곽 위에는 왜구를 물리친 도저성의 영웅 척계광戚繼光 장군을 기리기 위해, ‘척戚’자가 쓰인 깃발을 꽂아 놓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옛날 그대로 좁은 골목길 양쪽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 있다. 주민들은 집밖에 나와서 골목길을 걸어가는 우리 일행을 구경하였다. 쓰레기가 널려 있는 마을 길 옆의 개울인지 생활하수인지 모를 더러운 물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곳 시골집들은 모두 낡고 허름한 2층집이었는데, 이 지역은 습기가 많아 2층에 침실을 만들고 아래층은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도저성 주민 개울에서 빨래하는 여인들
최부 선생 기념비 제막식
이번 여행의 목적 중에 하나는 도저성에 최부 선생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다. 도저성은 570여 년 전에 세워졌으며 왜구를 물리친 척계광 장군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 척 장군은 그 곳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이다. 선생의 기념비를 도저성에 세우게 된 것은, 500여 년 전 올곧은 조선의 선비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488년 윤1월 5일
신 평생 오직 충효우애忠孝友愛만을 근본으로 삼고, 남을 속이지 않고…. 군명君命을 받들어 봉군하던 중 부친상을 만나 분상奔喪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죄로 이와 같이 벌을 당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신의 허물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으나, 동승한 40명이 아무 죄 없이 익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여, 이를 불쌍히 여겨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해 주소서. 그리고 신을 재생케 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주시고,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케 해주소서….
최부가 표류하는 배 위에서 하늘을 향해 쓴 간절한 기도이다.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었던 아름다운 최부 선생. 충성심과 효행심 그리고 인간애를 속으로 가만히 새기고 새겨 본다.
기념식이 진행될 연단을 세운 곳은 최부 선생이 최초로 심문을 받았던 관아터라고 한다. 중국 측에서는 절강성 임해시 정부관리와 문화유적 연구담당자들이 참석하였고, 도저성의 주민 1000여 명이 광장에 운집해 있었다. 한국에서는 나주시청 문화예술관련 공무원과 탐진 최씨 후손들, 중국여행 전문인 CHINA路 팀과 파주향토사 연구팀인 시조시인 이동륜 선생과 수필가 성희모 등 56명이다. 구경나온 그 곳 주민들은 인민복을 입은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인들 그리고 평일 한낮인데도 일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광장 옆 연못 가운데 세워진 최부 선생의 기념비에 씌웠던 천을 벗기는 의식이 끝나고, 성희모가 차를 올리고 이동륜 선생이 쓴 시조 <차를 올리며>를 내가 낭송하였다. 날씨는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아 들어야 할만큼 더웠다.
기념식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식장을 빠져 나와 성희모와 나는 ‘천후궁天后宮’을 보러 성벽 위로 올라갔다. 도저성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천후궁’에서 늙고 초라한 남자 두 사람이 우리를 따라와 무언가 설명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사당에서 향이 타고 있기에 향값을 주었더니, 남자가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한 남자가 자꾸 따라다니며 말을 붙이기에, 돈을 주려고 하니까 그는 손을 내 저으며 도망치듯 내려가 버렸다. 그의 친절을 오해한 것이 부끄러웠다.
차를 올리고 차를 올리는 헌시 낭송
성문과 관사
제막식을 마치고, 최부 선생 일행이 머물던 관사로 가기 위해 골목길을 따라 도저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은 반월형의 옹성 구조 형태로 500년 전에 쌓은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명?청 시대의 성곽시설이 대부분 옹성구조인 것은, 성문의 전면을 반월형으로 설치하여 양 측면에 문을 내고, 밖에는 해자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문과 성문이 일자로 되지 않아, 방어시설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성문 밖 바로 옆에는 개울과 길이 나란한데, 바로 그 길을 따라 최부 선생 일행이 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500여 년 전처럼 최부 선생 일행이 머물렀던 관사로 갔다. 도저성에는 1월 19일에 도착하여 2월 23일까지 머물렀던 관사가 아직도 있었다.《표해록漂海錄》에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여러 가지로 조사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사를 나와 그 마을의 양가리楊家里 고택에 잠시 들렀다.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일가를 이루었던 집으로 추녀 안쪽의 나무 조각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꽤 높은 지위를 가졌던 사람의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최초로 하룻밤을 지낸 안성사
도저성에서 최부 선생의 흔적을 다 돌아보고, 점심식사 할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침만 해도 안개가 끼고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차안은 웃옷을 벗어야 할만큼 더웠다.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왕금룡王金龍 선생의 안내에 따라, 최부 일행이 도저진에 들어가기 전에 하룻밤을 묵었던 안성사安城寺 터를 보고 가기로 하였다.
왕금룡 선생은 어제 항주공항에서 임해의 호텔 부사대주점富士大酒店에 도착했을 때, 오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합류했다. 그는 소설가이며 임해시 향토사학자인데, 임해시 일대에서 최부 표해록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버스의 왼쪽 앞자리에 앉았고, 그는 오른쪽 앞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안내하였다. 왕금룡 선생은 목소리가 우렁차다고 할만큼 커서 그가 가끔씩 핸드폰으로 전화를 할 때면, 갑자기 벼락이라도 치는 듯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바람에 기절할 듯 놀라곤 하였다.
도저진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던 버스를 길옆에다 세웠다. 왕금룡 선생이 가리키는 안성사 터는 낮은 구릉일 뿐, 어디에도 절이 있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임해의 특산물이 귤인데, 안성사 터 아래에도 귤나무 밭이 더러 있었다. 안성사는 최부 선생 일행이 바다를 표류하다가 우두외양에서 육지를 밟은 후, 서리당과 선암리를 거쳐 도저소로 오는 도중에 처음으로 잠을 잔 곳이다.
오후 한 시가 거의 다 되어서 화교진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침 7시에 겨우 빵과 죽만 먹고 6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많이 고팠다. 중국에서의 식사는 아침엔 뷔페식이고 점심이나 저녁은 회전식 테이블을 돌려가며 음식을 덜어먹는다. 보통 열두 사람씩 앉게 되는 테이블엔 커다란 그릇에 음식을 담아내는데, 앞에 놓인 개별 그릇은 우리의 간장종지보다 조금 큰 밥공기와 머그잔 뚜껑만한 접시를 준다. 하나씩 차례대로 내 오는 음식은 삶은 새우와 돼지족발, 무슨 줄기를 볶은 건지 찐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토란대였다. 긴 나무젓가락으로 아주 조금씩 음식을 집어서 먹어 보거나, 먼저 먹어 본 사람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먹을 만 하다는 대답들이었지만, 나는 밥 두 종지와 새우만 먹었다. 청경채 무침도 있었지만, 그것을 무친 소스에도 독특한 향이 들어 있었다. 마침 이동륜 선생의 배낭에서 꺼낸 고추장과 김과 멸치가 그렇게 반가웠다.
우두외양
점심을 먹은 후, 맨 처음 최부 선생 일행이 육지에 도착한 우두외양牛頭外洋으로 가는 길에 창밖을 내다보는데, 도로 옆 건물에서 집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남자가 이층지붕 위에 있고, 아래에서는 여자가 양동이에 담긴 시멘트를 도르래로 올려 주면서 부부가 집을 수리하고 있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삼십여 분 거리에 있는 우두외양 가까이에서 차는 멈췄다. 길 한 쪽에 둑길이 있고 길 양쪽의 넓은 새우 양식장이 있는 길을 걸어서 갔다. 최부 선생의 표해록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는데, 그들은 인근의 소학교 교사들로 왕금룡 선생과 십 여 년 동안 최부 선생 일행의 최초 표착지점을 확인하고 고증하는 일을 해온 향토사학자들이다. 그들과 만나 우두외양으로 가는 우두산 언덕으로 올라가며 보니, 오른쪽으로 보이는 얕은 바닷물이 심히 검붉고 탁해 보인다. 최부 선생의 일기에 적힌 대로 이곳의 바다 빛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다.
1488년 윤1월 16일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여 정박하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는 검붉은 색이었으며 바다 속은 매우 탁했다. 서쪽을 바라보니 이어지는 봉우리가 중첩되어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감싸고 있는데, 인가에서 나는 연기인 듯 했다. 동풍을 타고 가서 도착하니 바로 산 위에 봉수대烽燧臺가 나란히 우뚝 솟은 것이 많이 보여, 다시 중국의 경계에 도착한 것 같아 기뻤다.
오후에 풍랑이 더욱 위태롭고 비가 내려 어둑어둑했다. 배는 바람을 따라 내쳐졌으며, 순식간에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렀다. 해안을 지나며 보니 중선 여섯 척이 나란히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소의 머리를 닮아서 우두산이라 부르는 뒤쪽을 외양이라고 부른다. 우두외양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멀리 바다의 동쪽에 두 개의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최부 선생 일행은 닭처럼 생긴 소계도小鷄島와 대계도大鷄島 사이에서 조수에 밀려 해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500여 년 전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는 감회가 자못 깊다. 43명의 조선인들이 심한 풍랑의 바다에서 살길을 찾아 뭍으로 올라가던 장면을 생각하며, 바다를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에 제비꽃과 하얀색 난초과의 꽃을 발견하였다. 아직 2월인데 이곳은 남쪽이어서 날씨가 따듯하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묘지의 형태가 특이하다. 워낙 큰 나라여서 지역마다 장묘풍습이 다르다고 한다. 봉분은 없고 평평하게 시멘트를 발랐다. 앞에다 동물상을 만들어 세우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묘 주위를 시멘트로 둘러쳐 흰색으로 칠하고, 머리 부분 위에는 복숭아 끝처럼 뾰족하게 하여 그 가운데에 ‘복福’자를 써 넣었다. 정월이라 집집마다 붉은색 천에 금박으로 덕담을 써서 문 양 쪽에 붙여 놓고, 그 가운데 복 자를 거꾸로 써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오나가나 복 자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두외양 이 바라 보이는 언덕에서
선암리 다리
우두외양에서 나와 두 대의 버스는 선암리를 향해 출발했다. 선암리는 1월 16일 우두외양에 도착하여 그 이틀 후인 1월 18일에 지나갔던 길이고, 1월 23일 도저소에서 나와 관리들에게 호송되어 갈 때 다시 지나간 길이다.
1월 18일의 기록에는 “날이 샐 무렵 큰 다리가 있는 동네에 도착하여 마을 이름을 물으니 선암리仙岩里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버스를 길가에 세워 놓고 잠시 선암리의 큰 다리를 보고 가기로 하였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아치형의 다리가 있는데, 겨우 5~6m 쯤 될까한 길이에 폭은 2m가 좀 넘는 다리였다. 1월 18일에 최부 선생 일행은 이곳의 주민들에게 왜구로 오인 받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강탈당했다. 23일 도저성에서 길을 떠나 하룻밤을 길가에 있는 절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앞마을이 선암리였다. 왜구의 혐의를 벗고 관리들과 함께 있게 되었을 때, 일행 중 두 사람이 동네 이장을 불러 전에 안장을 뺏은 사람을 붙잡아 돌려 받았다. 갓과 망건 등은 찾지 못했으나 최부 선생은 선암리 주민들을 선한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다.
1488년 윤1월 23일
대개 도적들은 국경을 넘어 들어 온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 가운데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도적질하고 겁탈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산의 도적들은 우리를 죽이지는 않고 물건만 빼앗아 갔으며, 선암리 사람들의 경우는 겁탈한 물건을 숨기지 않고 안장을 돌려주는 것으로 보아 풍속과 기질이 유약함을 알 수 있었고 그다지 포악한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임해고성과 신라방
날이 완전히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는데, 강남장성江南長城이라고도 부르는 임해고성臨海古城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나이 든 사람들은 차에 앉아있고 몇몇 사람만 내렸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층계를 꼭 올라가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슬비를 맞으며 환하게 켜있는 전등 불빛에 의지해 가파른 층계를 한 발 한 발 198계단을 올라가는데 현기증이 인다. 임해고성은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古城으로 동진(317~420) 때부터 축성된 양자강 이남의 장성이다.
답사의 일정이 시간에 맞춰 진행되었으면 일찍 갔을 신라방 거리를, 어두운 밤에 찾아갔다. 이번 여행은 노인 분이 많은 탓에 계획대로 시간을 지키기 어려웠다. 비는 아까보다 더 많이 내리고 있다.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옛 신라방 거리인 자양고가紫陽古街엔 문을 열어 놓은 곳이 없었다. 음식점도 찻집도 있다고 하여 그 옛날 신라인처럼 차를 한번 맛보고 싶었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닫힌 문 앞에는 홍등이 화려하고 문마다 빨간색 띠에 금박으로 덕담을 써서 붙여 놓았다. 거리로 들어서서 잠시 구경을 하고 늦은 시간이라 빨리 돌아 나왔다. 신라의 무역상들과 사신들이 묵었던 자취가 남아 있는 이 거리에서, 674년 신라 보민왕의 태자 즉위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해상을 통해 무역을 하던 시대는 당나라 때인데, 지금의 건물은 명?청시기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자양고가 부근에는 신라인들이 드나들던 나루가 있고, 신라 상인들이 차를 마시던 찻집도 헐어져 가는 모양새로 남아있다고 했지만, 그 곳엔 가보지 못하였다.
옛 신라방 거리
어느 사이 우리 일행이 앉는 자리엔 고정 손님들이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주시청의 문화공보실장과 문화예술팀장과는 벌써 친해졌고, 우리와 이야기하기 편한 분들이 찾아 와 앉았다. 저녁을 먹고 어제 잠을 잤던 부사대주점에서 하루 밤을 더 지내기 위해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 왔지만, 중국에서의 밤을 잠으로 보낼 수는 없다며 노래방에 가자고 하는데, 임해는 작은 지방 도시여서 한국 노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젊은 대학생들은 나가고, 그들이 사다 놓은 과일을 안주 삼아 객들만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일정이 빠듯하여 숨가쁘게 지낸 길고 긴 하루였다.
고려사
중국 남부의 2월은 우리나라의 3,4월과 같은 날씨라더니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옛 고려사 터를 보러 항주로 이동하기 전에, 어제 밤에 어둠 속에서 잠시 보고 온 신라방을 다시 보러 갔다. 신라방(자양고가)으로 가는 거리에는 가로등이 도로 양쪽에 머리를 숙이고 마주 서서 아치를 이루고, 홍등을 줄줄이 걸어 놓아 그 밑을 지나가는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하였다. 신라방 거리의 길이는 1530m에 달하는 꽤 큰 규모이다. 비 오는 신라방 거리를 걸어서 집집마다 기웃거리며, 어쩌다 보이는 유리 문 안에 있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며, ‘저 사람들이 혹 신라인의 후예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신라방에서 이웃해 있는 가까운 곳에 중진고두(중진나루)가 있다. 이 곳 중진고두를 통해서 신라의 상인들과 무역선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나루 옆에는 신라인들이 들러 차를 마셨을 찻집 중진다루가 퇴색한 채 아직도 서 있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배에서 내린 신라인들이 통과해 들어가던 성문을 지나갔다.
날씨는 종일 흐려 있다. 임해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나고, 3시간을 달려 다시 항주로 이동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늘은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서 많은 곳은 볼 수 없고, 옛 고려사 터를 보러 갔다. 고려사는 그 당시의 최부 선생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었던 곳은 아니다.
1488년 윤2월 11일
날씨가 흐렸다. 양수록과 고벽이 함께 왔는데 고벽이 말했다. “항주성 서쪽 팔반령에 오래 된 절이 있는데, 이름이 고려사요. 절 앞에 있는 두 개의 비석은 옛일을 적고 있소. 여기서 15리쯤 되는데, 조나라와 송나라 때 사신이 와서 세운 것이오. 이렇게 국경을 넘어서까지 절을 지었던 것으로 보아, 귀국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소.” 내가 말했다. “고려 사람이 건축한 절이라 했소? 그러나 지금 우리 조선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유교를 숭상하고 있소. 사람들이 한결 같이 부모에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벗에게는 의리로써 대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소. 만약 중이 되려는 자가 있으면 군대로 보내 버린다오.”
그 현장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일기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고려 때 융성했던 불교가 조선에 와서 유교를 숭상하게 되면서 얼마나 배척 당했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고려사는 송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 1055~1101)이 그곳에 체류했던 것을 계기로 의천과 고려왕실의 후원으로 세운 것이다. 고려사 터에는 절의 흔적은 전혀 없고, 터에서 발굴한 돌로 기둥을 세워 만든 비각 안에 소동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고려사는 절강성에 관리로 와 있던 소동파가 불교를 탄압하여 없애 버렸던 것을, 청의 건륭황제가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그 후 문화혁명 때 또 수난을 당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고려사를 파괴했던 동파의 동상이 고려사 터에 세워져 있는 것도 서글픈 심정인데, 고려사 터 일부 연못 옆에 화가산장花家山莊이라는 일본호텔이 서있다. 화가산장은 일본 시즈오카靜岡 정부가 지어서 중국 절강성 정부와 공동경영하고 있다고 하여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고려사 터를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한국관광객들을 의식하고 뒤늦게 고려사의 중요성을 깨달은 중국정부는 원래의 고려사 터 근처에다 고려사를 복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왔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려사의 원래 이름은 927년 오월왕吳越王 전씨錢氏가 선원으로 건립한 혜인원慧因院이었다. 고려 문종文宗의 4째 아들로 태어난 의천은 31세 때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들어가 13개월여 체류하는 동안 이곳에서 고승 정원淨源법사를 만나 화엄학을 토론했다. 의천이 귀국 후 재정적인 후원을 한 것을 계기로 이름이 혜인고려화엄교사慧因高麗華儼敎寺로 바뀌었으며, 줄여서 고려사로 더 많이 불려지게 됐다.
또 의천과의 인연을 계기로 그의 모후 인예태후仁睿太后와 형인 선종宣宗도 금물로 쓴 화엄경을 보내 주었으며 숙종肅宗은 이를 보관할 경각經閣을 지을 경비도 시주했다. 1628년 간행된《옥잠산玉岑山 혜인고려화엄교사지》에 따르면 1312년 충선왕忠宣王도 고려 관리를 파견해 대장경 한 질과 사찰 보수비용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곳과 고려의 관계는 고려 후기까지 계속됐으며 고려사라는 이름도 1757년 법운사法雲寺로 바뀔 때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복원중인 고려사 옛 고려사 터에 세운 소동파상
다음날 아침 황산에 갈 예정이어서 다시 세 시간을 더 달려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한국을 떠난 후 며칠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으니, 힘이 솟는 것 같다. 칼칼하고 신선한 김치를 몇 번이나 더 달라고 하며 모두들 밥을 많이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온 식당 문 앞에서, 중국 여자가 털실로 짠 모자와 지팡이를 팔고 있었다. 이맘때의 황산은 눈보라가 치고 무척 춥다고 하여 모자를 하나씩 사들었다.
천하명산 황산
오늘도 만만치 않은 일정이어서 일찍 서둘렀다.
황산黃山은 중국 화동華東지역 안휘성安徽省 제일 남쪽 끝에 있으며, 안휘성을 지나가는 양자강 이남에 위치해 있다. 진시황전에는 황산을 삼천자도三天子都라 했다고 한다. 진시황 때부터 당천보년唐天寶年까지는 의산이라 했는데, 중국인의 선조 헌원 황제가 불로장생약을 찾아다니다가, 이 산에 와서 약초를 구해 400년간을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어, 당 현종이 황산이라고 불렀다한다. 황산의 높이는 해발 1864m이며, 연화봉蓮花峯과 천도봉天都峯을 비롯하여 7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산이다. 관광객은 산 아래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1000m를 올라가 정상 가까운 곳에서 걸어올라 간다. 우리의 옆으로 긴 막대기의 양쪽에 물건을 매달아 어깨에 멘 인부들이, 산꼭대기의 식당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언젠가 오대산에서 전기 레일을 설치해 놓고 산 위 절까지 생필품을 나르는 걸 본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람이 직접 물건을 나른다. 케이블카로 물건을 나르면 수월할 텐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한 정책이라고 한다. 관광철에는 케이블카를 타려면 3시간씩 기다려야 한다는데 오늘은 금방 탈 수 있었다.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황산의 절경은, 감탄사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저 아래로 뱀처럼 길게 누운 계단이 산을 향해 뻗쳐오르고, 그 길 위에는 어깨에 짐을 진 인부들이 까마득히 보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길을 오르기 힘든 사람들과 노인들은 완만한 코스로 가고, 다른 일행은 다소 험하지만 볼 것이 많은 산길을 택했다. 시멘트 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은 눈이 내려 상당히 미끄러웠다. 눈 내리는 황산은 올라가기에 쉽지 않았지만 황산의 설경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선물이었다. 발길 닫는 곳마다 절경이고 멀리 보이는 봉우리마다 신선이 놀았음직한 신비함에 가슴이 먹먹하다. 명나라 때 지리학자이며 여행가인 서하객徐霞客이 30년 동안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616년과 1618년에 황산에 갔다 온 뒤 말하기를, “중국에서 오악을 보기 전에는 산을 말하지 마라. 그러나 황산을 보고나면 5악五岳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얘기가 과장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 있는 소나무는, 우람하고 장대했으며 나무에 붙여진 이름대로 기기묘묘하였다. 나무마다 눈이 내려앉아 흰색 외엔 다른 색은 없는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깨끗하고 신성한 세계에 관광객들이 들어와 부산하게 움직이며 수런수런 고요함을 깨트린다. 잎 떨어진 겨울나무 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이, 살짝 녹다가 다시 얼어붙으며 만들어진 얼음 꽃은 세상의 어느 꽃보다 아름다웠다. 황산의 제일 높은 정상은 아니지만 반환점인 목적지에 도착해 광명정光明頂이라고 써 있는 바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황산 기상대 옆에 있는 상점에서 커피를 마셨다. 호텔 식당에서 싱겁고 맛없는 커피를 마셔 본 경험으로, 맛은 기대하지 않고 추위를 덜어 보려고 마셨는데 의외로 맛이 좋았다.
안개가 아름다운 서해협곡
눈 내리는 황산의 하늘이 머리 위로 낮게 드리워져, 겹겹이 둘러친 봉우리들이 지상을 떠나 하늘에 와 있는 듯하다. 길 옆 계곡에는 얕은 물길이 얼지도 않고 쉼없이 흘러내리며 목마른 길손을 유혹한다. 맑고 정갈하게 흐르며 적신 물맛은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것이, 가슴을 타고 내리며 머리까지 맑게 한다. ‘회음벽回音壁’이라고 쓴 곳에서 마주 보이는 절벽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는 이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고 눈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봉우리와 나무들과 계곡은 갈수록 기괴하고 신비하다. 내려가는 길이지만 길은 아래로만 향하지 않는다. 굽이굽이 산이 생긴 대로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며, 몇 십 명이 설 수 있는 넓고 큰 바위 위로 올라섰다. 바위 아래엔 꽤 깊고 넓은 서해협곡이 안개에 가려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득하다. 안개는 우뚝 솟은 봉우리만 내 놓은 채, 협곡 안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을 감추어 버렸다. 내 생애에 이렇게 아름다운 안개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마냥 안개에 서 있었다.
안개가 신비로운 서해협곡 사랑을 확인해 주는 자물쇠
사람들이 서 있는 넓은 바위 가장자리엔, 계곡으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 세워 놓은 쇠말뚝과 사슬로 만든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데, 쇠사슬엔 작은 자물쇠가 빈 틈 없이 매달려 있었다. 연인들이 자물쇠에 이름을 새겨서 매달아 놓으면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름다운 전설인지 바로 옆에서 자물쇠에 글자를 새겨주는 사람의 장사 속인지 알 수 없지만, 헤어지고 싶지 않은 연인들의 염원이 자물쇠에 매달려 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왔더라면 자물쇠에 이름을 새기고 싶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눈길로 내려섰다.
기이한 모양의 소나무
산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점 부근에 등소평이 황산에 왔다가 지은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음식의 재료는 인부들이 산 아래에서 어깨에 메고 올라온 것이어서 귀한 마음으로 먹었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 전에 더 볼 곳이 있다고 하여, 가이드를 따라 다시 산을 오른다. 그 길에는 자연유산에 등재된 소나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탐해송貪海松이라고 부르는 소나무는 절벽에 뿌리를 박고 서서 안개 짙은 계곡으로 가지들을 뻗치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계곡은 바다와 같고, 손처럼 내어 민 가지는 마치 바다를 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소나무가 두 개로 갈라져 부부 소나무로도 부르는 연리송連理松도 있었고, 가지의 형태가 거문고를 타는 것 같아 수금송手琴松이라 하는 소나무도 있었다.
거문고 처럼 생긴 소나무 <수금송>
명.청거리 구경
신안 강가에 있는 국제대주점國際大酒店에서 여장을 풀었다. 중국에서는 호텔을 대주점이라고 하는데, 처음엔 술집 이름인줄 알았다. 이동륜 선생과 성희모와 나에게 두 개의 방이 배정되었는데, 이동륜 선생이 혼자는 무섭다고 하여, 여행 내내 혼자 지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있는데, 성희모 선생이 명?청 거리에 구경 가자고 전화를 하였다. 로비에 있으니 5분내로 내려오라고 재촉이 심해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쫓아나갔다. 젊은 대학생과 통역을 맡은 중국 여선생과 함께 신안강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명?청거리로 들어섰는데, 늦은 시간이어서 문을 닫은 상점들이 더러 있었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을 보니, 우리나라 인사동 같은 곳이었다. 오래된 물건들을 구경하고 녹차를 조금 샀다.
거리 양쪽에 늘어선 집들은 명.청 시대의 건축양식으로 집의 좌우 벽이 지붕보다 더 높다. 그런 건축을 하게 된 데는 유래가 있었다.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안경시安慶市가 있었고, 남쪽에는 휘주시徽州市가 있는데, 그 둘을 합해서 건륭제가 안휘성安徽省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본래 안경시는 정치적인 곳이고 휘주시는 경제가 발달한 곳이었다. 명?청 시기에는 휘주문화를 형성할 만큼 휘주상인이 유명했다. 옛날에 안휘성은 오지여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양자강 북쪽 사람들은 그런 마을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송말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쫓겨 달아나던 사람들이 그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는데, 기후와 경치가 사람이 살기에 좋아 휘주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러나 먹고살기에는 부족하여 외지에 나가 소금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와야만 했다. 원래 이곳 사람들이 아니었던 그들은 각기 다른 부락을 형성하고 살면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집을 침입하거나 불을 지르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장사를 하러 나가면서,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조그맣게 만들고, 옆집에 불이 났을 때 방화벽 역할을 할 수 있게 집의 좌우 벽을 높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
명. 청 시대의 집(지붕보다 높이 만든 양쪽 벽)
산수화 같은 풍경
내일 항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면 다시 항주杭州로 돌아가야 한다. 이곳에는 눈이 올 때가 극히 드물다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오면 중국에서는 고속도로를 통제하여 갈 수가 없다고 하며 운전기사가 걱정을 하였다. 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 우려대로 길을 막아 놓았다. 할 수 없이 국도로 나왔지만, 거기도 통제하고 있어서 고속도로에서 나온 차들과 국도와 일반 도로에서 온 차들이, 이쪽저쪽 사방에서 밀려들어 끝이 보이지 않게 줄지어 있어 언제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엿 장사 맘대로가 법이라고 한다. 느긋한 중국인의 유명한 만만디를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려 있던 차들이 일시에 움직이려니 그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시골의 2차선 길은 대형 화물차와 비껴가기엔 너무 좁아, 차가 지나가기를 서서 기다려야했다.
몇 채의 집이 있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데, 사람들이 밖에 나와 구경을 하고 있다. 남자들이 손에 대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서 있기에 뭔가 하고 창문너머로 살펴보려는데, 한 사람이 나처럼 궁금했던지 내려가서 보고오더니, 바구니 안에 달구어진 돌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난로라고 하였다. 이층에 침실이 있는 이곳 사람들은 불을 때지 않아 집에 들어가도 춥기는 매 한가지여서, 그렇게 휴대용 난로를 들고 다니는 모양이다. 길 한쪽에는 눈이 오는 추운 날인데도, 한 가족인 아빠와 엄마와 조그만 계집아이가 대문 밖에 국수 그릇을 들고 나와서 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면서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고 있었다. 반대편 쪽에서도 한 여자가 길에 나와서 국수를 먹고 있다.
국도로 가는 아름다운 길 길에서 국수 먹는 여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차들이 거의 빠져나가 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렸지만 다시는 가게 될 일이 없는 길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길 양쪽으로 계속 이어지며 보이는 산과, 산 옆으로 흘러내리는 길고 긴 개울이 어우러져 대형 화폭에 그려진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서호
교통사정으로 늦어져 항주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항주에서의 일정은 서호西湖와 오산吳山을 보는 것이다. 가이드가 서호를 못 보고 가면 후회할 것이라고, 그 아름다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였다. 항주의 날씨는 비가 촉촉이 내리고, 마지막 유람선 출발 시간이 늦은 일행은 서호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선착장으로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기다리던 유람선은 사람들을 태우고 호수 가운데로 서서히 움직인다. 서호는 비 내리는 날에 더 아름답다고 하며, 인공호수인 서호엔 전설도 많고 유적도 많았다.
서호의 작은 다리에 장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장교에는 양산백과 추경대의 애달픈 사랑이 전해져 오고 있다. 부모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은 다리의 남쪽과 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추경대가 남장으로 변장을 하고 8년 동안을 서로 다리를 오가며 만났다. 밤이 깊어 헤어질 때는 너무나 안타까워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서로 바래다주기를 하룻밤에 18번이나 하였다. 그런 양산백과 추경대의 끝없는 사랑을 기리기 위해 장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배에 관광객을 태우고 서호를 떠다니는 뱃사공은 모두들 사람을 등지고 뒤로 앉아서 노를 젓는다고 한다. 청나라 4대 왕인 건륭제가 서호를 방문하여 유명한 가기佳妓와 연꽃차를 마시며 서호의 밤을 즐길 때, 사공이 앞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싫어 뒤로 앉아서 노를 젓게 한데서 유래 됐다고 한다.
아름다운 서호 서호 유람선
침어로 불리는 아름다운 서시
서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유물과 전설을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서시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서시는 양귀비, 초선, 왕소군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사람으로,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강변에 앉아 있는 서시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고 투명한 강물에 비취는데, 서시의 아름다움에 취한 물고기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하여,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오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가, 서시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 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게 되었다.
절세 가인 서시
서호를 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유람선 선원들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선착장에 배를 대 놓고 내리라고 한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나마 탈 수 없는 것을 미리 전화를 했기 때문에 기다려 주었다는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손님대접이 어찌 이럴까, 더구나 국익에 관계되는 관광정책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들의 처사가 한심했지만 어쩌겠는가. 이슬비 속을 걸어 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서호는 호수 면을 가르는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라는 두 제방으로 나뉘어져 외호, 내서호, 악호岳湖, 서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세분된다. 그 자체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보통 서호의 미경은 10가지로 꼽힌다. 겨울에 눈이 녹으면서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단교잔설斷橋殘雪, 백제 서쪽 끝에 호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인 평호추월平湖秋月, 서북쪽 비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호수에 연꽃 향기 그윽한 곳인 곡원풍하曲院風荷, 시인 소동파가 만든 제방인 소제춘효蘇堤春曉, 5백여 그루의 모란뿐 아니라 2백 종 1만 5천 그루의 꽃에 둘러싸여 홍어지紅魚池에서 노는 분홍빛 잉어를 바라보는 즐거움에 연유해 붙어진 화항관어花港觀魚, 서호의 동남쪽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가 고운 곳인 유랑문앵柳浪聞鶯, 호수 서남쪽에 있는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에 있는 북고봉北高峰이 산수화처럼 운치가 있는 쌍봉운雙峰雲, 서호 안에 만든 인공섬 남쪽에 있는 높이 2m의 석탑에 난 구멍으로 바라보는 달이 아름다운 삼담인월三潭印月, 지금은 들을 수 없지만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운치를 돋우는 남병만종南屛晩鐘, 뇌봉산雷峰山 꼭대기에 있던 뇌봉탑雷峰塔에서 비치는 석양이 분위기가 있는 뇌봉석조雷峰夕照가 그것이다.
서호를 보고 나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호에서 나와 양식 진주 매장에 들렀다가 전단강 을 따라 저녁을 먹을 곳으로 향했다. 전단강은 해마다 음력 8월 18일 전후가 되면 바닷물 대 역류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항주만 하구근처의 강 너비가 100Km나 되는데 반해 상류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좁아져서 2Km 정도로 좁아지기 때문이며, 게다가 일력과 월력의 영향으로 만조 때면 대 역류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막으려고 970년 북송 때 제방을 쌓고, 전단강 북쪽에 육화탑六和塔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 육화탑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남송시대의 고성
저녁을 먹은 후 송나라 때의 고성古城으로 갔다. 커다란 성문 위에 송성宋城이라고 써 있고, 안으로 들어 가보니 각종 민속관광 상품을 파는 민속촌이었다. 원래 항주는 춘추시대엔 월나라 성지였지만, 항주 사람들은 남송의 악비장군岳飛將軍이 있던 시대를 더 그리워해 송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성안에서는 남송시대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관광객에게 말이나 가마를 태워 주고 기념품을 팔며 무대에서 서커스를 하고 있었다. 송성가무쇼인 ‘송성 천고정’을 보기 위해 넓은 송성 안을 가로질러 극장으로 갔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쇼는 4장의 무대를 선 보였는데, 무대 양쪽의 대형 스크린에서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로 가무쇼의 내용이 자막으로 나오고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악비장군에 대한 가무극은, 현란한 서커스와 기예가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서호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중국의 전설적인 사랑을 다룬 얘기는, 줄에 매달려 나비춤을 추는 연인들을 사선으로 보이게 하는 조명기술이 환상적이었다.
한 시간 동안 쇼를 보고 나와 오늘의 일정이 끝났나 했더니, 발 마사지를 할 순서가 또 남았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우리는 발 마사지를 하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작별
중국을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 아침을 먹으며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항주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며칠 동안 함께 했던 분들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나주시청의 공무원과는 각별하게 지냈었는데, 연꽃 필 때면 꼭 찾아오라고 당부를 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탐진 최씨 회장과 다른 사람들도 꼭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넸다. 비행기는 제시간에 떠서 인천 공항에 11시 20분 쯤 도착하였다. 짐을 찾아 가지고 그동안 붙어 다녔던 CHINA路팀과 공항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꺼 두었던 핸드폰을 살려 놓았다. 전화기를 켜 놓자마자 반가운 사람에게서 소식이 온다.
최부의 묘
2월 표해록 답사를 다녀오고 나서, 5개월만에 나주에 있는 최부 선생의 묘를 찾았다. 통역을 맡았던 회포중학교 여선생들이 탐진耽津 최씨 후손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 나주로 가는 길에 동행하였다. 우기에 떠난 여행은 비를 몰고 다녔지만, 조금 불편한 것을 감수하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선 공주로 갔다. 공주에서 탐진 최씨 종친회 회장의 융숭한 접대로 하루를 묵으며, 마곡사와 무령왕릉을 보고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가도 들렀다. 종친회 회장과 가깝게 지내는 정현스님도 만날 수 있었는데, 스님은 마곡사 근처에 개인도량을 마련해 놓고 그림을 그리며 전시회도 여러 번 가졌다고 한다. 정현스님에게 설법을 듣고, 스님이 우려 낸 차를 대접 받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회장님이 준비해 둔 정현스님의 그림을 한 점씩 선물로 받았다.
다음날엔 나주시청에 가서 중국에서 만났던 공무원들과 점심을 같이 하며 반가운 안부를 나누었다. 문화예술팀장은 최부기념비 제막식 때 장고춤을 추었다. 나주문화센타에서 강의도 한다는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공무원으로 임명하고서 공무 외적인 일에도 참여하고 있는 행정이 유연해 보였다.
최부 선생의 일기를 번역했던 최상완 선생이 묘역에 가는 길을 안내하였다. 원래 있던 곳에서 이장한 묘에는 묘비가 두 개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최부 선생의 외손자로《미암일기》를 쓴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세운 것이다. 묘는 그리 크지 않고 소박하였다. 그의 일기를 읽고 그의 표류 발자취를 따라 다니며 느꼈던 감회가 묘 앞에서 새롭다. 잠시 묵념을 하며 500여 년 전의 선생과 내가 무슨 인연이 있어, 표류기에 붙여 여행기를 쓰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최부선생의 묘
오후 여섯 시에 최부 선생의 자손인 충청남도 부지사를 만나기로 했다. 일곱 시가 되어서 대전에 도착하여 만나게 된 부지사는, 중국여행을 같이 다녔다. 고급스런 분위기에 정갈한 음식이 맛있었다. 따로 준비해 온 홍삼주를 마시며 어느덧 시간이 지났다.
대전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12시가 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좌석에 앉자마자 표해록 여행의 마무리를 지었다는 생각에서일까, 안도와 함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