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 신라방
선암리. 신라방. 임해고성
선암리 다리
우두외양에서 나와 두 대의 버스는 선암리를 향해 출발했다. 선암리는 1월 16일 우두외양에 도착하여 그 이틀 후인 1월 18일에 지나갔던 길이고, 1월 23일 도저소에서 나와 관리들에게 호송되어 갈 때 다시 지나간 길이다.
1월 18일의 기록에 보면 ''날이 샐 무렵 큰 다리가 있는 동네에 도착하여 마을 이름을 물으니 선암리(仙岩里)라고 하였다.''
버스를 길가에 세워 놓고 잠시 선암리의 큰 다리를 보고 가기로 하였다. 큰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아치형의 다리가 있는데, 겨우 5~6m 쯤 될까한 길이에 폭은 2m 쯤 되어 보였다.
1월 18일에 최부 일행은 이곳의 주민들에게 왜구로 오인 받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강탈당했었다. 23일 도저성에서 길을 떠나 하룻밤을 길가에 있는 절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 앞마을이 선암리였다. 왜구의 혐의를 벗고 관리들과 함께 있게 되자, 일행 중 두 사람이 동네 이장을 불러 전에 안장을 뺏은 사람을 붙잡아 안장을 돌려받았다. 갓과 망건 등은 찾지 못했으나 최부는 선암리 주민들을 선한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다.
''대개 도적들은 국경을 넘어 들어 온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 가운데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도적질하고 겁탈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산의 도적들은 우리를 죽이지는 않고 물건만 빼앗아 갔으며, 선암리 사람들의 경우는 겁탈한 물건을 숨기지 않고 안장을 돌려주는 것으로 보아 풍속과 기질이 유약함을 알 수 있었고 그다지 포악한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살아있는 닭 때문에>
다리를 잠깐 보고 다시 버스로 돌아 와보니, 버스에서는 작은 소요가 일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후부터 문제가 된 일인데, 그때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은 것이다. 탐진 최씨 후손으로 참석한 한 팔순 노인이, 도저성에서 살아 있는 닭을 사서 한국의 나주까지 가져가려고 한 것이 문제였다. 가축을 비행기로 가져갈 수도 없거니와, 중국에서는 ‘조류독감’ 때문에 가축을 다른 지역으로 옮길 수도 없다고한다. 노인은 가이드 오광용군에게 가지라고 하였지만, 집에서 기르거나, 잡는 행위도 할 수 없다고 펄쩍 뛴 것이다. 그래서 선암리 마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마침 버스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주려고 하는 걸 보며 다리를 보러 갔었다. 돌아와 보니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노인이 거절을 하여 그때까지도 해결을 못하고 있었다. 닭을 처분하지 못해 애걸복걸하는 노인을 위해 결국 가이드 오광용군이 가져다 기르겠다고 하여, 그 일은 일단락되고 버스는 떠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그 노인을 닭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 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선암리 다리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회포중학교
날씨가 더워 버스 안의 히터를 끄고도 웃옷을 벗어야 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서쪽 하늘엔 석양이 붉으스레한데, 빗방울이 이따금씩 차창을 두드린다. 어두워 졌지만 아직도 오늘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소로 가는 길에 오늘 아침 기념비 제막식 때 영어 통역을 맡았던 여선생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앞으로 나오더니 지나가는 길에 있는 자기네 학교를 잠깐 들러 가자고 한다. 버스는 도시의 대로를 방불케 하는 길로 들어서서 크고 좋은 건물을 끼고 한 바퀴 돌았다. 건물은 길 양쪽에 세워져 있는데, 일반 중학교 하나와 고등학교가 2개로 2004년에 세워진 사립학교이며, 한 곳의 고등학교는 예술학교라고 하였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불 켜진 교실 창 너머로 보인다. 중국이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신문에서 본적이 있는데, 이 학교가 바로 인재양성을 하기 위한 특별한 학교인 듯했다. 학교 건물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니, 여선생이 학교 자랑이 하고 싶어 그런 모양이다. 중국에서는 학교선생의 수입이 좋아 선호하는 10대 직업 중에 하나라고 한다. 가이드에게 선생의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평균 2500위안 좌우라고 한다. 학교 수입 외에 과외 수업을 하면 훨씬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며 자세히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가이드를 하는 자기보다 3배나 더 받으니, 그만큼 따라 갈 수가 없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 한다.
임해고성
비는 크게 젖을 만큼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젖는 것도 아닐 만큼 내리고 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데, 강남장성(江南長城)이라고 부르는 임해고성(臨海古城) 앞에서 차를 세웠다. 나이 든 사람들은 차에 앉아있고 몇몇 사람들만 내렸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층계를 올라가야하나 잠시 망설였으나, 올라가 보기로 했다. 비를 촉촉이 맞으며 환하게 켜있는 전등 불빛에 의지해, 가파른 층계를 한발 한발 올라가려니 현기증이 인다. 198계단을 올라 가 내려다 보니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바로 아래 동호(東湖)엔 누각들이 여기저기 물위에 떠서 불빛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임해고성은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古城)으로 동진(동진 : 317~420)때부터 축성된 양자강 이남의 강남장성이다.
신라방 거리
답사의 일정이 시간에 맞춰 진행 되었으면 일찍 가 볼 수있었을 신라방 거리를, 어두운 밤에 찾아갔다. 이번 여행의 특성상 노인이 많은 탓에 계획대로 지켜지기는 어렵다. 비는 아까보다 더 많이 내리고 있다.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옛 신라방 거리인 자양고가(紫陽古街)엔 문을 열어 놓은 곳이 없었다. 음식점도 있고 찻집도 있다는데, 문이 닫혀 있어 그때의 신라인처럼 차를 한번 맛보려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닫힌 문 앞에는 홍등이 화려하고 문마다 빨간색 띠에 금박으로 덕담을 써서 붙여 놓았다. 거리로 들어서서 잠시 구경을 하고 늦은 시간이라 빨리 돌아 나와야 했다. 신라의 무역상들과 무역상을 위한 사신들이 묵었던 자취가 남아 있는 신라방거리, 이곳에서 674년 신라 보민왕의 태자 즉위식이 거행 됐었다고한다. 신라인들이 해상을 통해 무역을 하던 시대는 당나라 때 였는데, 지금의 건물은 명. 청시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양고가 부근에는 신라인들이 드나들던 나루가 있고, 신라상인들이 차를 마시던 찻집도 헐어져 가는 모양새로 남아있었다.
임해시에서 제일 깨끗하고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파주 향토사 팀이 앉는 자리엔 고정 손님들이 합석을 하고 있다. 나주 시청의 문화공보실장과 문화예술팀장과는 벌써 친해졌고, 대학교수나 우리에게 관심 있는 분들이 그때 그때 합석을 한다. 저녁을 먹고 어제 잠을 잤던 부사 대주점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물렀다.
늦은 시간에 호텔로 돌아 왔지만, 중국에서의 밤을 잠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주의 문화예술 팀장과 몇 몇 사람이 노래방에 가자고 해서 로비로 내려갔는데, 임해는 작은 지방 도시라서 노래방에 한국 노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가고, 우리는 객실로 돌아와 CHINA路 팀과 술을 마시기로하고 그들의 방으로 갔다. 대학생인 두 청년이 있는 방에는 과일과 술이 있었다. 그런데 두 청년과 챠이나로 팀장 신춘호선생은 회포중학교 여선생들에게 줄 선물을 서울에서부터 사 가지고 온 터라, 그들과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 그 방의 주인인 두 청년은 놀러 나가고, 로비에서 여선생들에게 선물만 전하고 들어온 신춘호 선생과 객들만 둘러 앉아 술을 마셨다. 일정이 빠듯하여 숨가쁘게 지낸 길고 긴 하루였다.
신라인들이 배를 내리던 중진 나루 상인들이 드나들던 찻집 (중진다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