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유럽 5개국을 가다 (프랑스) 개선문
凱旋門 (Arc de Triomphe)
파리 시내는 개선문에서 샹제리제거리와 콩코드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개선문은 파리의 시작점이자 파리 여행의 상징적 의미로 통하며.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의 끝 12개의 방사선대로 중심부인 샤를 드골 광장 한복판에 세워 져 있다. 50m 높이로 에펠 탑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로 나폴레옹이 1805년에 있었던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싸워 이긴 "오스테를리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본 따 지었다고 한다. 1806년 나폴레옹의 명으로 ‘장 샬그랭’과 ‘장 아르망 레몽’이 설계했고, 나폴레옹이 죽은 후인 1836년에야 완성되었다. ‘프랑수아 뤼드’가 '1792년 용사들의 출정'을 전면에 조각으로 장식해놓았다. 개선문의 바닥에는 무명용사의 묘가 설치되어 '영원한 불길'이 항상 타오르고 있다. 빅토르 위고의 장례행렬과 제 1차 세계대전의 승전 퍼레이드가 개선문을 지나갔으며 1944년 8월에는 이 자리에서 드골이 파리 해방을 선언 했다고 한다. 개선문을 사진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도 끼어 사진을 찍는다. 유럽의 관광지는 소매치기 천국이니 가방 조심하라고 가이드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기 때문에 가방을 점퍼 안 쪽에 메고도 가끔 더듬어 본다. 흐렸다 개였다 변덕이 심한 날씨 때문에 사진이 우중충한 회색빛이서 실망이다.
개선문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끝 12개의 방사상 대로의 중심부인
샤를 드골 광장(1753~1970년에는 에투알 광장이라 했음)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전승기념 구조물. 1806년 나폴레옹의 명으로 장 샬그랭과 장 아르망 레몽이 설계했고, 나폴레옹이 죽은 후인 1836년에야 완성되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는데, 그 높이와 너비는 2배 크기이다.
프랑수아 뤼드가 전면에 조각으로 장식해놓은 '1792년 용사들의 출정'
(일명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이 유명하다.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각 전투에 참가했던 600여 명의 장군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안의 자그마한 미술실에는 개선문의 역사를 말해주는 그림, 사진, 모형 들이 진열되어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면 앞으로는 콩코르드 광장, 루브르 궁이 보이고, 뒤로는 라 데팡스가 보인다. 개선문의 바닥에는 무명용사 묘가 설치되어 '영원한 불길'이 언제나 타오르고 있다.
빠리로 가는 길에 핀 벗꽃~ 겨울인데도 벗꽃이 만발했다.
유럽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묘지가 도시의 한 쪽에 이렇게 넓게 자리잡고 있다.
묘지 옆으로 아파트와 상가 건물이 있고, 체육관 건물도 보였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군사를 환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문. 프랑스 역사의 영광의 상징으로 높이는 50m이다. (개선문은 지금 보수 중이었다.)
1792년 의용군의 대출정(Le Depart 1792) 라 마르세이예즈(La Marseillaise) 작. 1792년 마르세이유에서 지원한 의용병들이 출전하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만든 부조.
1815년의 평화(La Paix de 1815 Antoine Etex) 앙 투앙느 에텍스 작.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하고, 제2차 파리조약과 함께 잠시동안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나날을 표현 지혜의 여신은 한손에 창을들고, 전쟁에서 싸우던 군인은 칼을 거두고 생각에 잠긴 모습과 농경사회를 상징하는소, 아이를 앉고있는 여인, 등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부조
저항(La Resistance de 1814) 앙 투앙느 에텍스 작.
저항 수호신의 단호한 표정과 참가자들의 모습과 왼쪽에는 아들의 다리를 붙잡고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왼손으로는 아이를, 오른손으로는 남편의 팔을 잡고있는 아내의 습을 볼수 있다. 저항의 신은 의지있고 결연했지만 프랑스는 대패하고 말았다.
개선문 앞 광장에는 개선문을 사진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개선문에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인증 사진은 남겨야~ 가방을 왜 옷 안쪽에 맸냐면 유럽의 관광지는 소매치기 천국이니 가방 조심하라고 가이드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1805년에 있었던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싸워 이긴
"오스테를리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 지었다.
개선문 광장 안으로 들어가는 지하도
빅토르 위고의 장례행렬과 제 1차 세계대전의 승전 퍼래이드가 개선문을 지나갔으며
1944년 8월에는 이 자리에서 드골이 파리 해방을 선언하기도 했다
개선문은 파리의 시작점이자 파리 여행의 상징적 의미이다
개선문-샹제리제 거리- 콩코드 광장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