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대마도 여행 첫날
대마도는 우리 땅이었다
<2013년 9월 30일 대마도 여행>
9월 30일부터 부터 10월 2일까지 2박 3일의 대마도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서 대마도 까지는 49.5km의 거리이며,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한국이 훨씬 가까워 부산에서 여객선을 타면 1시간 40분이 걸린다. 인구가 4만5000여명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규슈 사이에 있는 섬으로 행정상으로는 나가사키 현에 속하며, 인공 운하에 의해 남과 북의 두 섬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민들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어촌으로 농지가 전체 면적의 3%에 불과한 척박한 곳이다. 고려 때부터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살기에 어려워 그곳의 왜구들이 수시로 우리나라로 쳐 들어와 도둑질을 해 가곤 하였다. 그래서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살기에 어려운 곳으로 여겼다. 세종 때인 1419년에는 이종무가 1만7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벌하여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았지만, 속지로 삼을 경우 섬 주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 해 주어야 할 것을 걱정하여 회군하고 말았다. 대마도는 몇 년 전부터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궁핍한 섬이었다고 한다. ‘대마’는 일본어 ‘Tsushima[對馬]’를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제주도의 5분의 2에 불과한 709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인 대마도는 오랜 세월 이어져온 한국과의 인연으로 구석구석 한국의 자취를 품고 있는 곳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땅이었다>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한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대마도에서 말을 달렸고 고려시대에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리는 등 실질적인 우리영토임을 입증하는 기록이 남아있고, 특히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실린 ‘팔도총도’에는 대마도, 독도,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 그리고 13세기 말 편찬된 일본 ‘진대(塵袋)’에서는 대마도가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고, 사람의 모습이나 토산물이 신라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후생성 발표에 따르면 B형간염을 일으키는 HB-바이러스 표면에는서는 adr, adw, ayw, ayr등 4종의 단백질이 발견되는데, 일본인은 adr형과 adw형이 7:3정도인 반면 한국인은 거의 100%가 adr형이다. 현재 대마도 주민역시 100%에 가깝게 adr형으로 나타났다. 대마도의 문화 유적과 대부분의 절에 신라와 고려 때의 불상이 있고 조선시대의 범종이 달려있으며, ‘총각’ ‘지게’등 일본에서 쓰지 않는 우리말이 300여개가 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의 다른 섬에서 발견되지 않는 청동검과 청동거울 등, 고조선 유물이 대마도에서 다량 발견된 것은 한반도와 문화적 맥을 같이 한다는 증거이고, 대마도에서 발굴되는 고분은 일본의 옹관묘와는 전혀 다른 고조선 이래 우리 고유의 장묘양식인 상식석관묘 혹은 상식목관묘라는 점도 그 증거이다.
대마도와 제주도를 한국영토로 표기해놓은 지도는 얼마든지 있는데,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정식으로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었다. 하지만 전쟁 중인 한국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