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반쇼인(万松院)
7. 반쇼인(万松院)
<만송정사>
덕혜옹주봉축비가 있는 가네이시성터를 나와, 뒤 쪽에 위치한 반쇼인(万松院)으로 이동 했다. 만송원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 담장 아래, 용이 휘돌아 감고 오르는 문양이 새겨진 원형 돌 위에 태극문양이 새겨진 石鼓(돌북)가 있다. 옆에 세워 논 안내문에 한자와 일어로 쓴 글을 역시 한자만 대충 읽어보니 諫鼓(간고)라 되어 있고, 영주에게 간언할 일이 있는 인민은 이 돌 북을 울려 간언하라는 것이지만,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 북을 쓸 일이 없으니 새들이나 앉아서 놀다가는 것으로 이용 된다는, 말하자면 영주 선정비였다.
만송원 본당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출입구 밖에서 본당 안을 들여다보니 만송정사(萬松精舍)라고 쓴 편액이 보인다. 만송원 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그곳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위패를 모신 제단에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초상화와 역대 장군들 16기의 위패가 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정권이 무너지자 도쿠가와를 신으로 모셨던 사당 동조궁(東照宮)이 폐사되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서 생존할 수 있으니, 생명줄인 조선과 교역을 재개할 수 있게 해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대한 대마도주의 감사의 표현으로 도꾸가와 가문의 위패를 옮겨온 것이다.
만송원은 대마도 19대 번주인 ‘소우요시토시’가 1615년 죽은 후, 그의 아들인 20대 번주 ‘소우요시나리’가 ‘가네이시 성터’ 뒷산에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명복을 빌 ‘쇼우온지(松音寺)’라는 절을 지었다. 그 뒤 아버지의 법명을 따서 ‘반쇼인’으로 개칭하고 1647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때부터 대대로 ‘소우’씨 가문의 묘지가 되었다. 본당 가까이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향합과 향로가 놓인 앞에는 일본 본토에서는 볼 수 없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祭器三具足>
본당 안 제단을 밖에서 찍고 우측 유리 안에 진열 된 제기삼구족(祭器三具足)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기삼구족이 놓인 곳 정면 벽에 종이에 한자와 일어로 쓴 글이 붙어 있는데, 일어는 알 수 없고 한자만 읽어 보면 <朝鮮國王 寄贈 三具足>이라고 써있다. 제기삼구족을 조선의 임금이 하사한 것이라는 글이다. 조선의 임금이 그동안 선린외교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 주고 국교를 다시 맺는데 많은 공헌을 한 ‘소우요시토시’의 죽음을 애도하여 하사한 것이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씨가 써있는 종이를 스카치테이프로 대충 붙여 놓았다. 진품이 아닌 복사품일지라도 이렇게 부실하게 설명을 써 놓지는 않는다. 성의 없이 붙여 놓은 스카치테이프가 빛을 받아 번쩍이는 것이 귀중한 역사 유물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삼구족 기물들은 놋으로 만든 것으로 상당히 크고 문양이 정교하다. 오른 쪽의 촛대는 맨 아래 거북이 있고 거북의 잔등이에 긴 다리를 쭉 펴고 있는 키 큰 학이 촛대를 입에 물고 있다. 가운데는 네모난 향로위에 해태가 왼쪽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듯 하고, 왼 쪽에는 문양을 넣고 조각을 한 큰 꽃병이 있다. 이 세 점이 한 틀이 돼서 제기삼구족이라 한다. 원래는 조선에서 제기삼구족 세틀을 보냈는데 둘은 전쟁 때 공출하여 무기로 만들어 쓰고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조선에서 보낸 놋 제기를 조선을 치는데 사용할 무기로 사용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8. <죽은 자들의 정원>
만송정사에서 발길을 옮겨 양쪽에 석등이 죽 늘어서있는 가파른 돌계단을 향해 올라갔다. 돌계단 양 쪽으로 수많은 석등이 사열하듯 서 있고, 삼나무가 우거진 묘정(墓庭)의 풍경은 만송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곳이 무덤이 있는 곳이 맞는가 생각하게 된다. 여기는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일본의 3대 묘지 중 한 곳이라 한다. 조선과 화친하며 대마도를 번성 시켰던 19대 도주 소오요시토시(宗義智)가 1615년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48년의 일생을 마치자, 그의 아들인 20대 소오요시나리(宗義成)가 긴세끼조 뒷산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산 밑에 쇼오온지(松音寺)라는 절을 짓고 명복을 빌었다. 쇼오온지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만송원)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로 소오가의 도주와 일족들이 대대로 묻히며 일본의 3대 묘지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 사적이 되었다.
소오(宗)가 무덤은 돌계단을 올라가면 역대 도주들의 묘석이 장엄하게 줄지어져 있는데, 묘지는 上단, 中단, 下단 등 세 곳으로 나뉘어져 下단에는 일족 및 소오가에서 출가한 사람, 中단에는 측실과 아동, 上단에는 역대 도주와 정부인의 묘석이 있다. 계단 맨 위에 올라서니 밑둥치 보다 위쪽이 더 큰 거대한 삼나무가 있었다. 천연기념물 지정된 나무는 둘레 7m 높이 40m의 거목으로 만송원 창건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라 한다. 고목이지만 나무는 튼실하고 아직도 푸른 잎이 무성했다. 삼나무가 만송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대마도 번주 ‘소우요시토시’는 이마미야 신사에 모신 ‘고니시마리아’의 남편이다. 장인인 ‘고니시 유끼나까’가 죽자 마리아를 버렸던 인물이다. 조선과 일본 본토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대마도의 운명은 정변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 그의 입장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으로 번성한 곳으로 임진왜란의 전쟁을 직접 겪으면서 양대 국에 끼여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인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나섰던 ‘소우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역사적으로도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통신사 초청을 성사시킨 사람이 소오요시토시였다. 일본과 조선의 사이에서 양국의 정세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대마도의 입지 상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은 ‘조선과의 화평을 최우선시’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소우 요시토시’의 무덤이 가장 먼저 이곳에 자리 잡은 조상임에도 그의 묘지가 가장 작다.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는 가장 궁핍하고 피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만송원 묘역의 중단에 덕혜옹주와 결혼 했다가 이혼한 ‘소오다케유키’가 재혼한 일본인 처의 무덤이 있었다. 덕혜옹주와 ‘소오다케유키’가 이혼하지 않았다면 여기 이 무덤의 주인공은 덕혜옹주의 무덤이 되었을까. 그것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아 씁쓸한 마음에 괜한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