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역사 유적

동산취제단

예강 2014. 12. 6. 21:32

8월 5일 



<이국에서 환자 발생>

  오늘은 먼 거리를 이동해야하는 빠듯한 일정이어서, 일찍 아침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제 시간에 출발 하지 못하고, 거의 1시간여를 버스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이번 답사에는 80세가 넘은 분이 두 분이 참가했는데, 그 중에 한분이 밤사이 배탈이 나서, 탈수 증세가 심하여 도저히 같이 떠날 수가 없게 되었다. 수지침을 가지고 다니는 교감선생이 침을 놓고, 지압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써 보았지만, 워낙 연로한 분이어서 여행을 계속하기에는 무리였다. 왕진을 청한 의사가 와서 입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본 후에야 버스는 출발 할 수 있었다. 책임 있는 여러 사람이 서로 남아서 간호를 하겠다고 했지만, 현지 여행사 사장이 남아 있기로 하였다. 



  <삼륜택시>


  호텔이 있는 시가지는 그리 번화한 곳이 아니어서, 아침 출근 시간이지만 복잡하지 않았다. 큰 도시에는 택시가 있는 걸 보았는데, 그곳의 택시는 삼륜차를 포장마차처럼 만들어 투명 문을 달고, 안쪽의 의자에 사람이 앉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빠르지는 못하고, 작은 오토바이 정도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승객이 타고 있는 재미있는 장면을 찍으려고 여러 번 시도 해 봤는데, 달리는 버스에서 정확한 순간을 포착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려면 교통신호를 잘 지키고, 상황에 따라 판단만 잘하면 웬만해선 경적을 울려야할 일이 없는데, 운전기사는 수시로 경적을 울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복잡한 시내에서는 물론이고, 한적한 곳에서 길옆을 지나가는 사람을 봐도 “빠앙” 멀리 마차나 다른 차만 보여도 크고 길게 “빠아앙”하고 경적을 울렸다. 여행하는 5일 동안 내내 경적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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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륜 택시

 

 

<동산취東山嘴護제단>


  호텔이 있는 시내를 벗어나자 보이는 풍경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뿐이었다. 넓고 넓은 평야에 보이는 건 옥수수뿐이어서, 세상에 인간이 먹는 식물은 오직 옥수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옥수수 밭을 지나 3시간을 달려 간 곳은. 지금의 요녕성의 객라심좌익喀喇心左翼 몽고족 자치구의 대능하 서안에 위치하고 있는 동산취 제단이었다. 옥수수밭 가운데로 조금 올라가니 넓은 터가 보인다.


  이곳에서 1979년 5월에 대형 제단 유적인 ‘동산취유적’이 발견되어 주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시작되었다. 동산취에 이어서 1983년과 1985년에 거쳐 50km 떨어진 능원현과 건평현 경계 지역인 우하량촌牛河梁村에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1986년에 7월에 우하량유적에서 기원전 3500년 전의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여러 발굴 결과를 토대로 우하량유적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의 모든 조건을 갖춘 ‘초기문명사회’라고 발표하였다. 기원전 3500년 당시 계급이 완전히 분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 졌으며, 초기문명단계에 진입한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동산취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곡에서 흙으로 빚은 코를 발굴 하였는데, 나중에 다른 지점에서 코가 없는 여신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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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 다른 곳에 떨어져 있던 코와 얼굴을 붙인 여신 얼굴  


  그러면 왜 이 지역을 고조선 유적으로 보는가.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동검, 적석총 등 중국문명에서는 없는 고조선과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적석총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민족 고유의 장묘형식이라는 점이다. 우하량의 여신이 혹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것은, 기이하게도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한 시기라는 것이다.


  

<제단터에서 제를 올리다>


  제를 올리기로 했다. 교감 선생이 발굴된 찻잔 그림을 보고 급하게 빚어 고이 가져온 찻잔에 차를 따르고, 오는 도중에 산 사과와 배, 수박도 차리고, 내가 풀숲에서 꺾어 온 노란 야생화까지 꽂아 놓고 예식이 엄숙하게 진행 되었다. 처녀 세 사람을 선녀로 삼아 머리에 수건을 두르게 하고, 젊은 남자들은 모자에 풀을 꽂고, 초헌관이 차를 올렸다. 국악인인 즉석 창으로 노래를 하였다. 함께 절을 세 번인가 하고, 제문을 읽는 순서에 초헌관이 손수지은 시로 제문을 대신 하였다. 고조선 유적으로 추정하는 우리 문화의 시발점인 이곳 제단 터에서, 5000년의 시공을 넘어 찾아와 제를 올리며 제문을 읽는 제관의 목소리가 떨린다. 모두들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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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취 제단에서 제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