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봉
8월 7일
<홍산 공원>
하가점 유적지에서 다시 호텔로 돌아와, 아침 8시 30분 경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 하였다. 적봉 박물관을 관람하고 10시 50분경 홍산 공원에 도착 하여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말 그대로 온통 붉은 빛깔 이었다. 홍산 문화는 적봉시 홍산후紅山后 에서 발굴한 유지遺址 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산후 유적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9.18사변을 일으켜 동북 3성을 점령한 후, 1933년 조양, 능원, 흥륭(나중에 흥륭와 문화가 발견된 곳) 승덕, 적봉 등지의 신석기시대 유적을 2개월 동안 발굴하고, 다시 1935년 홍산 뒤쪽에서 1000여점의 유물을 발굴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 후 몇 년의 세월이 흐른 1943년 능원현에 있는 능원 중학교 교사가 밭 주변에 흩어진 돌무더기(적석총)을 발견하였는데, 홍산 문화 우하량 유적의 적석총이었다. 최근에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우하량 유적 등, 신석기문화를 모두 광의의 ‘홍산문화’라고 일컫는다.
홍산 공원 입구 붉은 빛의 홍산(적봉)
<봉황산(아사달)>
홍산 공원에서 나와 4시간을 달려 조양에 도착하였고, 오후 3시가 돼서야 점심 식사를 하였다. 대능하 유역에 위치한 조양은 제법 큰 도시였는데, 지나오며 보니 좁은 하천을 넓혀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곳에서 얼마 안가 봉황산 ‘봉황사’가 있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봉황산이 예전에 구월산이었고, 곧 아사달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아사달은 ‘삼국유사’에 단군왕검이 도읍으로 정하고 다스렸다고 전하는 지명이다. 구월산 즉 아사달이 있던 곳이 평양, 또는 황해도 일대에 있는 구월산으로 알려 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봉황사 향을 사르며
봉황사 보살 와불 봉황사 뒷산의 탑
<고조선의 도성 왕검성>
고조선 시대 도성인 '왕검성'은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표기했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는 <위서>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고, 또 <고기>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도 하였다. <사기색은>에서는 '왕험성'에 대하여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고 하였다.
'험독'에 관해서 <한서> 지리지에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며, 물이 험한 곳에 위치해 험독險瀆이라한다’고 하고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를 바로 험독이라 한다.’고 했는데, 패수는 지금의 하북성에 있는 조백신하를 가르킨다. 또 사마천의 <사기>에는 ‘요동 험독현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 있다.’ 고 하여, 여기서의 요동은 당시 요수인 난하의 동쪽을 말한다.
고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과 '험독', 그리고 '패수'라는 지명과 그 위치를 규명하는 일은 우리민족의 뿌리를 찾는 열쇄이다. 기자조선(BC 1140-BC 194)의 129년간의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한 험독은 한무제에게 나라를를 빼앗긴 위만조선의 도읍지였다.
난하가 흐르고 갈석산, 창여가 있는 뇨룡과 영평지역에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고려성(만리장성 서쪽)이 있고, 조선현, 고려보, 낙랑, 조양,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역사가 널려있다. 여기에 홍산문화로 지칭되는 우하량, 동산취, 하가점, 흥륭와, 조보구, 등의 유적지가 발굴되어 5천년 역사의 ‘신비의 왕국’이 ‘탄소년대측정’ 등 과학적인 검증을 거치며 찬란한 문명으로 탈바꿈 되고 있는 중이다. 그 문명이 고조선일 가능성은 석곽무덤, 적석총,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청동기, 옥기, 천원지방사상 등으로 알 수 있다.
(답사자료에서 참고)
<조양과 봉황산의 전설>
봉황사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며 인솔교수가 말해준 전설을 여기에 옮겨 본다. 옛날에 '조양'이라는 젊은이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혼자 나무를 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나무를 하러갔는데, 봉황 한 마리가 독수리한테 추격을 당해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조양'이 구해 주었고, 봉황은 떠나지 않고 '조양'과 같이 돌아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조양이 나무를 하고 돌아왔는데,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났다. 다음날은 예쁜 선녀가 나타나 조양에게 말하기를 '자기는옥황상제의 셋째 공주인데 인간 세상에 내려와 봉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로 부터 조양은 나무를 하고 조양은 베를 짜며 재미있게 살면서 딸 쌍둥이를 낳았다. 공주는 시간이 날때마다 딸들에게 천상의 얘기를 해 주었다.
천상의 옥황상제는 공주가 제멋대로 인간 세상에 간 것을 알고, 천병을 거느리고 벌을 주러 내려 갔다. 그러나 공주가 조양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인간 세상에 남겠다고 하자, 아홉마리의 봉황이 떨어지며 공주를 봉황으로 변하게 하였다. 조양이 봉황모양의 황금비녀를 가지고 가서 공주와 두딸을 구했다. 그들은 이후 인간으로 만족하게 살았고, 아홉마리의 봉황은 9개의 탑으로 변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은 '봉황산'이라고 하였고, 그 지역은 '조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봉황사에 벽화로 남아 있는 전설
* 참고자료
<단군과 고조선>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 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자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를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였다.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 사회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통치이념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였다.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 되었다. 단군은 제정일치 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위만의 집권>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자,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 . 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고,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 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 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 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여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간에 걸쳐 한의 군대와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은 강력히 반발 하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갔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고 말았다.
<패수와 왕험성 고찰>
'고조선의 영역과 지명, 위치를 중심으로' 중에서 일부 이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