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일본 여행

항아리 일본 여행기 (오사카성)

예강 2014. 12. 6. 19:31

오사카성

 

 동대사에서 나오니 다른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 팀 밖에 없다. 100m 달리기로 헐레벌떡 차에 올랐더니, 우리를 쳐다보는 눈~ 눈들~ 벌써 차에 와 앉아 있으니 도대체 다들 구경은 하고 온 겨? 그냥 온 겨?

 마지막으로 우릴 태운 버스는 2시 30분에 출발하여 오사카로 달려가, ‘오사카성’(大阪城) 아래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바라다 보이는 오사카성의 ‘천수각’이 웅장하다. ‘오사카성’은 ‘구마모토성’, ‘나고야성’과 더불어 일본의 3대 성으로 불린다. 그 중 오사카성에는 이중해자가 유명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한 성이다.  

 

오사카성과 토요토미에 관한 역사는 따로 쓰기로 하고, 성 주위를 살펴보자. 천수각을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데 바깥 족 해자에는 물이 차 있었고 안쪽의 해자에는 물이 말라 있었다. 거대한 해자는 바위를 쌓아 올려 축조 한 것으로 바위 크기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천수각으로 들어가는 문도 크고 두꺼워 성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성안을 돌아보고 다시 버스까지 가는데 주어진 시간은 겨우 1시간~ 3박 4일 동안 너무 많은 곳을 보도록 한 관광 일정은  <수박 겉 핧기 관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천수각에 올라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박물관을 보고 싶었으나 포기하고 말았다. 오사카성은 ‘오다노부나가’에서부터 시작되어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자식들 세대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된 일본 최대의 성이자 일본 권력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일본시대 중 가장 혼란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혼란한 시대를 겪으면서 평화로운 시대가 오길 갈망하였다. 이런 시대를 통일시켜 나가는데 세 명의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지금의 일본인에게 까지 큰 감명을 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태생부터 성격까지 다른 점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차이는 새가 울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쉽게 알 수 있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으면 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즉시 죽여 버리고, 히데요시는 새에게 자극을 주던지 놀라게 하여 새를 기어코 울게 하고, 이에야스는 자신이 새를 쥐고 있는 한 도망을 가지는 못할 것이니 죽지 않도록 하며 언젠가 울 때까지 새를 보호해 준다는 일화가 있다. 


전국시대를 거의 평정한 ‘오다노부나가’는 교토의 천황을 보좌한다는 명분하에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오사카에 화려하고 거대한 오사카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믿었던 부하의 손에 무참히 죽음을 당한다. ‘오다노부나가’ 가문의 가신이었던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오다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거병을 하였다. 명분에서 밀린 반대세력을 일순간에 제압하고 전국시대를 제패하고 전국을 평정한다. 이 과정에서 오다의 대부분의 가족이 토요토미히데요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오사카성은 토요토미히데요시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토요토미히데요시 역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고, 그 후 도쿠가와이에야스에게 그 권력이 넘어가고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오랫동안 일본의 전국은 평화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 후 명치유신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면 그 기반은 오사카성의 최후의 승자였던 도쿠카와이에야스가 마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아닌 도쿠카와이에야스가 대단한 이유는 히데요시는 자식을 낳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고 영리했지만 덕이 부족하여 진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부족한 반면 도쿠가와이에야스는 먼저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자식을 많이 생산하였고 가신을 진심으로 대함은 물론이고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의 근본을 보임으로써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게 되자 그 때 겨우 6살 이었던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오사카성에 유배하지만,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게 된 후로도 히데요시의 추종세력은 여전히 강세를 떨쳤고 특히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 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도쿠가와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재산을 탕진하기 위해 그에게 도쿄에서 지진으로 무너진 호고지(方廣寺)를 재건하라는 명을 내린다. 호고지는 원래 히데요시가 천하통일 후 그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은 사찰이었기 때문에 이를 재건하라는 말을 도쿠가와가 자신들과 화해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착각한 히데요리는 기쁜 마음으로 호고지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영악한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재건된 호고지의 종 내부에 새겨진 “국가는 평안하고 군신은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한다.(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는 문구를 트집 잡아, 국가안강의 家와 康은 ‘이에야스’ 를 뜻하며, 그 사이에 글자를 집어넣은 것은 도쿠가와 가문을 반으로 쪼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고 군신풍락의 신풍의 발음은 토요토미이니 이는 토요토미의 자식이 다시 번창할 것이라는 의미라며 결국 토요토미의 후손이 도쿠가와를 멸망시키고 다시 천하를 잡겠다는 의도가 포함된 문구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 문구는 실재로 도쿄의 호고지 종에 새겨져 있는데 깨알 같은 수천자의 글자 중에서 이 3문만 발견해 내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의도된 음모였던 것이다.

히데요리는 그때야 도쿠가와의 원래 목적을 알아차리고 탄식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614년 압도적인 수의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으로 진격해 온 도쿠가와 였지만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해자 때문에 성을 함락 시킬 수 없었다. 오사카성의 넓고 깊은 2중 해자는 철벽의 수비력을 가진 것이다. 해자 때문에 이대로는 도저히 성을 함락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도쿠가와는 화해를 하자고 하며 “화해의 뜻으로 바깥 쪽 해자를 메운다면 병력을 철수 하겠다”는 제안을 해 온다. 애초부터 전세가 절대적 열세였던 히데요리는 마침 겨울이 다가와 물이 얼어 버리면 얼음 위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위험성도 있어, 히데요리는 그 말을 믿고 첫 번 째 해자를 흙으로 메워 버렸다. 그러나 6개월도 지나지 않은 1615년 여름이 되자 도쿠가와는 다시 오사카성을 공략하여 함락 시키고 말았다. 오사카성이 함락 되자 히데요리는 천수각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로써 토요토미 가문과 그의 추종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일본 전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