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의 바람
<탄자니아의 바람>
벌써 가을이 오는가.
창문 너머 푸르러 진 하늘이 저 만큼 높아지고, 뭉게구름은 하늘아래서 양떼처럼 몰려다닌다. 하늘 바라보다 푸른 빛깔에 물들었을까. 가슴이 간지러운 듯, 아린 듯 쓸쓸하다. 어제 그가 보내 온 갓 볶은 탄자니아 원두를 갈아 내어, 향 짙은 커피를 머신에 내려 집을 나선다. 삼릉 숲길을 돌아 성종의 첫째 왕비였던 공혜왕후의 순릉 정자각 돌난간에 걸터앉아 본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아버지 한명회의 후광으로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 없이 일찍 죽은 불운의 왕비. 왕비였지만 홀로 묻혀 있는 공혜왕후의 능침이 정자각 제향 공간 사이로 쓸쓸히 올려다 보인다. 성종은 계비 정현왕후와 멀리 강남에 묻혀 있으니 그녀의 영혼은 늘 외로웠으리.
여름의 끝자락 바람이 분다. 장마철도 지나고 태풍도 비껴갔는데 무슨 때 늦은 바람인가. 가만가만 부드럽게 부는 새 색시 바람도 아니고, 세상을 뒤흔드는 태풍도 아니다. 마구 거칠게 다가와서 마초의 냄새를 풍기며 내 몸을 휘감고 어루만지며, 성긴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달아나는 바람의 꽁무니가 저리도 섹시했던가. 산수유 붉은 열매가 루비처럼 고혹적으로 빛나며 유혹해 보지만 바람은 매정하게 뿌리치며 나뭇가지 사이로 달아나 버린다. 바람의 손길에 ‘후드득’ 산수유 몇 알 땅위에 떨어져,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온 시냇물 속에 빠져 버린다.
바람 부는 숲길에서 작은 보온 컵의 뚜껑을 열어 탄자니아 커피의 향을 맡는다. 컵 속에서 향을 품고 안개처럼 피어오른 따스한 기운이, 순식간에 바람의 겨드랑이 밑을 파고들며 능선위로 치닫는다. 커피 향을 훔쳐 간 바람은 탄자니아에서부터 구름에 얹혀 흘러흘러 여기까지 온 것일 터이다. 아프리카 밀림 커피 농장에서 빨간 생두를 애무하던 바람은 수만리 창공을 날아 사랑 찾아 왔는가. 발정 난 암고양이처럼 바람 따라 가 버린 커피 향도 고향 탄자니아의 바람이 그리웠으리. 왕의 영혼도 가끔은 탄자니아의 바람처럼 왕비를 찾아 먼 하늘을 돌아 여기까지 왔었을까. 나무 잎 무성한 순릉의 숲, 거기 어둑신한 그늘 아래서 외로운 날들을 서성였을 열아홉 꽃 같은 왕비여~
2014년 8월 31일
커피 향을 훔쳐 달아나다 떨어트린 한 줌 바람이 컵 속에 구름처럼 떠 있다. 탄자니아 커피에 탄자니아 바람을 섞어 깊고 그윽한 그리움을 마신다. 모든 것이 다 그리워지는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