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밍크 코트와 노점상

예강 2009. 1. 22. 20:11

  밍크코트와 노점상                                   


   얼마 전 잃어버린 숄을 다시 사려고 남대문 시장에 들렸다. 1월 초가 되도록 눈 한번 제대로 내리지 않던 날씨가, 오늘 따라 제법 춥다.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 겨울옷을 도매 값에서도 20퍼센트나 더 할인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숄이 없어 대신 순모로 된 티셔츠를 싼 값에 사가지고 나왔다.   

  지하철을 타려고 노점상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치는데, 그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그 가운데서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 틈새로 보니 건장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욕설을 퍼 붓고 있다. 예전에는 시장에서 손님과 상인 간에 가끔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요즘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광경이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가까이 가 보려고 다가서다가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까만색의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가 물건을 담아 놓은 커다란 상자위로 내 동댕이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간신히 일어서려는데 남자가 다시 힘껏 밀쳐서 이번엔 물건이 쌓인 좌판위로 나뒹군다. 무슨 일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마치 내가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분노와 공포를 느꼈다.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구경을 하고, 옆자리의 노점상 남자는 말릴 생각은 않고 가세하여 폭언까지 한다. 그 남자는“뭐, 우리가 사기를 친다고, 당장 꿇어앉아서 잘못했다고 빌어.”라며 더욱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폭력을 행사하던 남자가“우린 사기나 치면서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야.”하면서 다시 때릴 듯이 한손을 치켜들고, 옆의 남자는 계속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는 어쩌다가 노점 상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을까. 비싼 옷을 입었다고 몇 천 원짜리 노점의 물건을 사지 말란 법은 없지만, 겉치장만큼 내면의 품위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여자는 그렇지 못했던 걸까. 처음엔 뭐라고 대꾸를 하던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엉거주춤 초라한 모양새로 당하고만 있다. 여자가 내 동댕이쳐지는 것을 보면서, 어릴 적에 담 너머에서 들려오던 이웃집 아이가 매 맞고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공포감이 내 가슴을 옥죄인다.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 터에, 올 겨울은 날씨가 따듯해서 겨울 상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니, 상인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어려운 형편이다. 요즈음엔 시장이라도 바가지를 씌우거나 형편없는 물건을 팔지 않는다. 노점상이라도 늘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사기를 칠 리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고작 몇 천 원짜리 물건으로 사기를 치면 얼마나 칠 수 있을까. 밍크코트의 여자가 노점의 물건을 하찮게 대했을까. 장사가 잘 안 되니 살기 힘들어져 그들의 가슴에 분노와 비애가 쌓여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여자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노점의 남자들은 끝까지 친절하게 물건을 파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할인하는 티셔츠를 사들고 잠깐 기분이 좋았지만, 시장에 넘쳐 나던 사람들이 예전 보다 줄어들고 상인들이 아귀다툼 하듯 싸우던 광경을 보고나니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들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 지하철을 탔다. 열차는 어두운 지하를 달려가고 있다. 차의 유리창에 사람들의 모습이 비친다. 따듯한 차안에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편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이 비치고 있는 유리창의 영상위로 밍크코트를 입은 여자와 노점상 남자가 싸우던 모습이 자꾸 겹쳐져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