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길에 버려두고

예강 2007. 9. 6. 22:23
 


  길에 버려두고



                                                                          오   순   희



  연 녹색의 가죽 장갑을 잃어 버렸다. 지난겨울에 이어 이태 째 내 손을 따듯이 감싸 주며, 마음까지 녹여주던 장갑을 잃어버린 건 순전히 조급한 성격 탓이다. 집에서 주차장 까지 약 30m쯤의 거리로 바로 옆이기는 하지만, 손등을 스치는 찬바람을 참으며 장갑을 손에 든 채로 차 있는 곳까지 가는 건, 시동을 걸고 예열하는 동안을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료한 시간을 참지 못하는 내게는 그 3분이 길게 느껴진다. 손에 끼려다 없어서 집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장갑은, 현관문을 잠글 때 떨어트렸나 보다.

  친정 가족들이 모일 때면 급한 내 성격이 화제에 오르곤 한다. 몇 해 전에 두 여동생과 봄옷을 사려고 남대문 시장에 간 적이 있다. 동생들과 나는 이 상가 저 상가를 다니며 구경도 하고 마음에 드는 옷을 샀다. 그리고 우리는 맛있는 점심식사까지 하였다.

  내가 가끔 동생들에게서 흉을 듣게 되는 사건은 돌아가는 길에서 벌어졌다. 시장에서 나와 버스를 타려면 남대문 지하도 사거리를 통해 길을 건너 가야한다. 동생들과 나는 쇼핑백을 두어 개씩 손에 들고  복잡한 시장을 빠져 나왔다. 앞서 걸어가며 가끔 뒤 돌아 보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저만치서 따라오고 있다. 그래도 내가 앞서 가고 있으니 제대로 따라 올 것이라 생각하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 중간 쯤, 길이 양쪽으로 갈라진 곳에서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 동생들을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오지를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했더니, 동생들은 나를 찾다가 보이지 않자 오른 쪽 계단으로 올라가 길 반대편에 가 있었다. 동생들과 내가 사는 곳이 서로 달라 각자 버스 타는 곳에 제대로 가 있기는 했지만, 동생들을 길바닥에 내 버리고 갔다고 만나기만하면 몰아세운다.

  친정어머니의 생신 날, 또 남보다 먼저 밥을 후딱 먹고 숟가락을 놓자, 급한 내 성미가 도마에 오르며 동생들은 자연스레 그 일을 또 들먹였고, 얘기를 듣고 있던 큰 딸아이는 “이모 그건 약과예요. 엄마는 병원에 갔다가 나를 길에 내 버려두고 혼자서 가버리기도 했어요.”하고 한 술 더 뜬다. 임신한 딸애를 데리고 정기검진 받으러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몸이 무거워 천천히 걷는 것을 부축해 주지는 못하고, 버릇대로 어느 틈에 몇 걸음 빨랐던 모양이다. “엄마.”하는 뾰족한 소리에 아차 싶어 걸음을 멈추었지만, 비난을 면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딸과 동생들이 웃으며 하는 농담 섞인 원망에, 멋쩍게 따라 웃으며 변명의 말로 얼버무려 보지만, 마음속은 쥐구멍을 찾는다. 연노하신 친정어머니와 걷다가도, 빨라진 내 걸음에 움찔하며 걸음을 늦추기도 하니 조급증이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게으르다 싶을 만큼 느긋한 성격이었다. 지금의 나를 보면 어디 그랬을까 싶지만, 그 때는 약골이었던 체질 때문인지 건강하고 역동적인 성품의 사람들 보다 비실비실한 편이어서 야무지지 못했다. 일찍 일어나지도 못하고, 집안일을 잘 돕는 동생만도 못해 어머니께 야단을 맞곤 하였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그때는 차멀미까지 심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맥을 못 추었다.

  그때 우리 집은 식품과 각종 잡화를 파는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살림집은 상점에 달려 있었다. 군사 지역이어서 트럭이 질주하고, 훈련이 자주 있어 장갑차가 좁은 도로에서 굉음을 내며 지나가곤 하였다. 휴일이면 소음을 피해 책을 들고 개울건너 뒷동산을 향해 집을 나섰다. 그때 나는 푸르던 숲 그늘, 넓고 반듯한 바위에 홀로 앉아 낮게 엎드려 있는 마을의 집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곤 하였다. 앞날의 꿈으로 가슴 벅찰 나이에, 학교도 사회도 불합리한 제도에 매여 삶의 고통은 너무나 뚜렷하고, 행복의 길은 묘연해 권태로운 일상으로 느긋하게 하품하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성격이 나이를 더해 갈수록 변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만큼 급한 남편의 성격에 맞추느라 변했을까. 숨 가쁘게 변화하는 현대생활을 따라 가다보니 그리 되었을까. 그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나를 변하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몇 십 년을 살아오면서 변하지 않았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니.  

  그러나 내 성격을 순전히 환경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남녀 학생이 한 반에서 공부하던 시골 중학교에서, 머슴아들이 내 걸음걸이를 보고 붙여 준 별명이 ‘털렝이’였다. 그때도 나는 털레털레 걸음이 빨랐던 모양이다. 결혼 후에도 남편과 내가 외출하여 나란히 걸을 일이라도 있으면, 운동회 날 달리기를 하면 꼴찌를 면하기 어려웠던 나는 저만치 앞서 가고,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남편은 몇 발작 뒤에서 따르곤 하였다. 성미 급한데다가 육상선수까지 했던 남편의 걸음이 느린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결코 부지런 하다고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빨랐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급한 것과 부지런한 것이 같지 않고, 부지런하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무엇을 위해서 그리 허둥대며 살아 왔는지 딱히 짚이는 것도 없다.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를 비판하며 ‘느리게 살기’가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여, 그것에 대한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던 때가 있었다. 텔레비전 건강프로그램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곤 하였는데,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늘 무엇엔가 �기는 것 같았고, 숙제 안하고 실컷 놀다 들어온 아이처럼 늘 불안하였다.

  정신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몸에도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몇 달 전부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무릎의 이상도 평소에 빨리 걷는 걸음걸이가 문제인 것 같다. 혹사당하다 못해 비명을 지르며 나를 주저앉힌 무릎이, 얼마 전부터는 쉬어야 한다고 신호를 보내 왔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무시하고 계획 했던 일본여행을 떠나 강행군에서 돌아 왔을 때는, 오른쪽 무릎이 상당히 부어 있었다. 검사에 나타난 무릎 연골은 퇴행성관절이었는데, 무리해서 걷느라 연골에는 물이 차 있어서 빼내야 했다. 계속 치료를 하고 있지만 온전한 무릎으로 되돌릴 수는 없어, 신주단지 모시듯 아끼고 또 아껴 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아닌가.

  어릴 때 집을 나서 산으로 숲으로 나돌던 버릇 때문인지, 나이 들어서도 집을 비우고 종종 길을 떠난다. 여행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길을 나선 것만으로도 마음에 행복이 가득해 진다. 길을 가다 보면 많은 것들과 만나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엮어내는 사연들, 풍요로움과 빈곤, 행복과 불행, 길 위에서 만나는 것들을 주워 모은다. 길에 버려두고 잃었던 것, 잠시라도 뒤에 두고 소홀히 했던 사람들, 그런 내 삶의 일상들을 찾아서 추억의 상자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어야 할까보다.

  길에 버려진 장갑은, 잃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가, 그의 손을 따듯이 감싸 주고 있을 것이라 위안을 삼는다.